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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세종 예악정치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

by 도생(道生) 2016. 12. 2.

세종대왕의 예악정치(禮樂政治) 실현에 앞장선

조선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는 조선 초기 문화융성시대를 열어 조선의 문화 기반을 다져 놓았고,

조선의 군주이며 만백성의 어버이인 조선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임금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문화융성의 꽃을 피웠다.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치세(治世)를 있게 한 명재상으로 방촌 황희정승과 고불 맹사성이 있다.

방촌 황희정승과 고불 맹사성은 세종대왕의 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보필한 조선의 명재상이다.

세종대왕은 행정, 외교, 국방 등은 방촌 황희정승(1363~1452)이 문화와 교육 등은 고불 맹사성(1360~1438)이 맡겼다. 

 

 

 

 

 

세종대왕은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꿈꾸며 위민(爲民)과 애민(愛民)의 민본정치(民本政治) 편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정치는 백성을 가르치고 깨우치기 위해 훈민정음 창제 등과 같은 교학정치(敎學政治)와 예악정치(禮樂政治)로 실현된다.

 

 

예(禮)는 질서이며, 악(樂)은 조화다.

예악정치는 예(禮)와 의(義)에 따라 공경하고 보은하며 분별하여 나라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고,

하늘과 땅, 그리고 임금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소통하며 화합하여 하나 되는 것이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9월 11일(1430년)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로 교학정치를 시작하였고, 예악정치는 맹사성과 박연 등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단종실록 7권, 단종 1년 7월 9일(1453년)

예전에 세종대왕께서 신에게 하교하시기를, '나라를 다스림에 예보다 중한 것이 없으나, 악(樂)의 소용(所用)도 또한 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는 중히 여기나 악(樂)에는 소홀하여 이를 익히지 않는 일이 많으니 이는 가히 한탄할 일이다....'

 

 

 

 

우리 음악 향악이고 중국 음악이 아악(雅樂)이다.

고려 때 들어온 중국 음악으로 조상의 제사(종묘제례)를 지내는 것보다 우리 음악으로 조상께 바쳐야 한다는 고불 맹사성, 대명사대(大明事大)의 사상이 있던 박연은 중국음악 아악으로 조상 제사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대왕은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라고 하는 한편, 고불 맹사성에게는 향악을 집대성하게 하여 중국음악과 우리 음악을 적절히 조화롭게 융합하여 우리만의 종묘제례악을 만들었고,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완성된다.

 

 

 

 

 

 

 

 

 

 

 

 

 

 

맹사성은 조선의 명정승으로 불리지만,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우의정과 좌의정으로만 8년 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문신이면서도 예술적인 재능이 많았던 고불 맹사성에 대한 일화는 수없이 많다.

 

 

소탈한 성격과 검소한 생활을 한 청백리로 유명하다.

효(孝)와 의(義)와 실천하였고, 언제나 겸손함을 잃지 않고 누구를 만나도 예(禮)를 다하였다.

소를 거꾸로 타고 다니면서 백성을 삶을 바로 보고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던 고불 맹사성은 조선의 명재상이 되었다.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년(136)에 충청도 온양에서 전교부령을 지낸 유학자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1386년(고려 우왕 12)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며 고려 조정에 출사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1396년(조선 태조 5) 예조의랑으로 재직하던 고불 맹사성은 신덕왕후 강씨가 승하하자 존호를 올리는 일과 강씨의 조카사위 정희계의 시호를 올리는데 참여 한다. 이때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이며 조카사위인 정희계의 시호에 크게 노하면서 파직된다.

 

1399년(정종 1)에 우간의대부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나간다

1403년(태종 3) 좌사간대부가 된다.

1404년(태종 4) 노비소송에서 노비를 양인으로 잘못 판결하여 파직되고 유배된다.

 

 

 

 

 

 

 

 

 

 

 

 

 

 

 

 

1405년 동부대언으로 임명되다시 조정에 돌아왔고, 1408년(태종 8)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에 임명된다. 

태종의 둘째 사위이며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 역모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권근과 이숙번 등 조정 신료들이 극형을 면하게 해달라는 요청하면서 장 백 대로 감형되고 파직되어 유배된다.

 

 

1411년(태종 11) 충주 목사에 임명된다.

하륜이 예조에 맹사성이 음률에 정통하니 임금께 예조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고, 태종은 맹사성을 불러 정악(正樂)을 정비하도록 한다. 이후 황해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 1416년(태종 16)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418년(세종 1) 공조참판, 이조참판과 의정부찬성을 거쳐 문관으로서는 최초로 중앙의 군부대, 삼군부를 지휘하는 삼군도진무에 임명된다.

 

 

 

 

1427년(세종 9) 고불 맹사성은 드디어 우의정에 오른다.

6월 21일 영의정 황희의 사위인 서달의 종들이 고을 아전을 죽인 일에 청탁, 비호, 묵인 등을 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황희와 함께 파직당했다가 7월 4일에 다시 우의정 관직을 받는다.

1431년(세종 13) 9월 13일 방촌 황희정승이 영의정에 오르고, 고불 맹사성은 좌의정에 오른다.

 

 

1435년(세종 17) 76세의 고불 맹사성은 세종에게 사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1438년(세종 20) 세종의 치세를 빛나게 했던 조선의 명정승 고불 맹성이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0월 4일 1438년

 

좌의정 그대로 치사(致仕)한 맹사성(孟思誠)이 죽었다.

사성의 자(字)는 자명(自明)이며 신창(新昌) 사람이었다....

 

을묘년에 면직되기를 청하므로 이에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정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나아가서 문의(問議)하였다.

이에 죽으니 나이는 79세이었다.

 

부음(訃音)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슬퍼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조회를 정지시키고 관(官)에서 장사를 보아주게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니,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待接)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淸白)하게 절조를 지킴을 정(貞)이라 한다.

 

 

사성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가 얕은 자라도 뵈이고저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꾸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매양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石璘)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음률(音律)에 능하여 혹은 손수 악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무릇 조정의 큰 일이나 거관 처사(居官處事)에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단점이 있었다.

외아들 귀미(歸美)는 먼저 죽고, 손자가 둘이 있으니 효증(孝曾)과 계증(季曾)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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