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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세종대왕 용비어천가

by 도생(道生) 2017. 1. 8.

조선왕조 최초의 국문(國文) 시가(詩歌) 세종대왕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조선왕조 27명의 임금 중 세종대왕은 가장 위대한 성군이라는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백성에게 글을 알 수 있게 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국방, 과학, 문화, 사회, 경제, 농경 등 가장 하층계급이었던 노비에서부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정승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모든 백성을 위해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1442년(세종 24)부터 1445년까지 3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1446년 반포된 훈민정음의 실용성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를 신하들이 지어 올리게 하기 위하여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태조 이성계가 1380년 왜구를 물리친 업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함이라 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왜구가 내륙을 약탈하려고 1백여 척의 배에 약 5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금강하구(군산, 장항)에 상륙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고려의 병마도원수로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을 이끌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약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쳐들어온 것과 비교하면, 200년 전의 5만 명의 왜구는 대군이다.

1380년의 진포해전은 단순한 노략질이 아닌 고려와 왜구의 전쟁상황이라고 봐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용비어천가는 10권 5책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 건국의 정통성과 공정왕(조선 2대 임금 정종)을 빼고,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여섯 임금을 업적과 덕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찬양의 노래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아니더라도 고려, 고구려 등의 나라에서 국가와 임금의 정통성,대 임금을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글은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 조선의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졌고, 최초의 국문 시가로서의 가치도 있는 용비어천가지만,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다.

 

 

 

혹자는 세종대왕에게 올린 용비어천가를 중화를 받드는 사대(事大)의 글, 임금에게 아부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 무문곡필(舞文曲筆)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념과 사상, 특히 정치에서 권력에 아부하는 글이나 모양새를 보고 용비어천가를 빗대어 말하는 예 있다.

 

 

 

 

 

해동성국의 여섯 용이 날아(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시니 옛 성인과 같으시니

(용비어천가 제1장)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려 꽃은 좋고 열매가 많으며,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마르지 않고, 시내를 이뤄 바다로 간다.

(용비어천가 제2장)

 

주국의 대왕은 빈곡에서 제업을 열었고, 우리의 시조께서는 경흥에서 왕업을 여셨다.

(용비어천가 제3장)

 

천세 전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쪽에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고, 왕조의 운명이 끝이 없다.

(용비어천가 제125장 中)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3월 1일(1442년)

경상도와 전라도 관찰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홍무 13년(고려 우왕 6, 1380년) 9월에 왜구가 떼를 지어 육지로 올라와 우리의 경계를 침략하였을 때에, 우리 태조께서 부오를 정비하여 이끌고서 바로 운봉에 이르러 한번에 소탕하였으니, 그 훌륭한 공(功)과 위대한 업적은 후세에까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때의 군마의 수효와 적을 제어한 방책과 접전한 수와 적을 함락시킨 광경 등을 반드시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니,

경은 도내 여러 고을에 산재하여 사는 늙은이들에게 널리 다니며 방문하여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자 하여 이러한 전지를 내린 것이다.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4월 5일(1445년)

의정부 우찬성 권제,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 등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0권을 올렸다.

"어진 덕을 세상에 널리 베푸시고 큰 복조를 성하게 열으시매, 공(功)을 찬술하고 사실을 기록하여 가장(歌章)에 폄이 마땅하오니 이에 거친 글을 편찬하와 예감(睿鑑)에 상달하옵니다....

 

천지를 그림하고 일월을 본뜨오니 비록 그 형용을 다하지 못하였사오나, 금석에 새기고 관현에 입히면 빛나는 공을 조금 드날림이 있을 것이옵니다. 만약 살피어 등이시고 드디어 펴 행하사,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큰 업이 쉽지 아니함을 알게 하시고, 시골에서 쓰고 나라에서 써서 영세에 이르도록 잊기 어렵게 하소서, 편찬한 시가(詩歌)는 총 1백 25장(章)이온데, 삼가 쓰고 장황(裝潢)하여 전(篆)을 아뢰옵니다." 하니

판에 새겨 발행하기를 명하였다.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5월 5일(1447년)

예조에서 좋은 술 50병과 소, 양, 기러기, 오리 등 물건을 진상하니, 임금이 강녕전에 나와 창기(倡妓)와 재인(才人)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관현악(管絃樂)으로만 하고, 노래는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10월 16일(1447년)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5백 50본을 군신(群臣)에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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