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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시대 훈구파(공신) 사림파(유림 선비)

by 도생(道生) 2017. 1. 12.

조선 시대 정치권력의 대립 훈구파(공신세력)와 사림파(유림儒林, 선비세력)

 

 

 

 

 

 

 

 

 

 

 

 

 

조선왕조시대 국가를 움직였던 양대세력으로 공신세력 훈구파와 유림(儒林), 즉 선비세력 사림파로 구분한다.

태조 이성계의 조선 창업에 이바지한 유림(儒林)의 학자와 무장(武將)이 훈구공신이 되었다.

 

훈구(勳舊)는 말 그대로 오랫동안 국가와 임금을 위하여 공(功)을 세운 사람 훈구공신(勳舊功臣) 또는 훈구대신(勳舊大臣)이라 한다. 사림(士林)은 유림(儒林)이라고도 하며, 선비세력을 말한다.

 

 

 

조선 건국 이후 이방원의 1, 2차 왕자의 난에서 활약한 인물도 공신첩이 주어졌다.

조선 3대 왕 태종은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공신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세종 때까지도 훈구공신이 활동하였으며, 조선 건국 이후 유림의 선비들도 과거제도를 통해 지적으로 조정에 들어왔다.

 

 

 

 

 

 

 

 

 

 

 

 

공신(功臣)은 건국, 반정, 전쟁, 반란 등에서 국가와 임금을 위해 공을 세운 신하를 말한다.

단종 때까지만 해도 세종과 문종의 유지를 받든 고명대신 외에는 특정세력이 정치권력을 독점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어린 단종을 내쫓아 왕위를 찬탈하면서 특정세력이 권력을 독점한다,

세조 즉위에서 성종 즉위까지 수많은 공신이 양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훈구공신(勳舊功臣)세력이 권력을 독점했다.

 

세조가 남발한 공신첩으로 권력을 장악한 훈구공신은 예종과 성종 초기에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성종은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사림(士林, 선비)세력을 등용한다.

 

 

 

 

성종은 경상도 선산부사 김종직을 조정으로 불러들였고, 점차 사림세력이 조정의 청요직을 맡는다.

김종직은 고려말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조선 유림(선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종직은 성종의 지원으로 사림파 세력의 정계진출에 기반이 되었고, 세력이 커지면서 명실공히 훈구파(공신세력)와 맞서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파(선비세력)로 자리 잡았다.

 

 

 

 

 

 

 

 

 

 

 

 

 

훈구파는 자신과 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림의 선비세력, 즉 사림파와 대립했고, 때론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훈구파와 사림파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충돌이었고, 사림파 역시 권력을 잡으면 보수 기득권세력이 되었다.

 

 

훈구파(공신세력과 외척세력)와 사림파(유림의 선비세력)의 충돌로 사람파가 큰 화를 입은 것을 사화(士禍), 즉 선비들이 입은 재앙이라 한다. 조선 시대 4대 사화는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 무오사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있다.

 

 

 

 

 

조선왕조시대에 훈구, 사림 등은 본래부터 사용하던 말이었고, 근대에 와서 훈구파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림파라 하였다.

정치세력으로 공신세력(훈구파)과 선비세력(사림파) 외에 외척세력도 있다.

 

 

사류(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세력 훈구파, 사림파 등은 이병도가 근대에 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다.

일제 식민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는 한국사대관(조선사대관, 국사대관)에서 조선이 3백 년 동안 당파싸움하다 결국 패망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쓴 조선사대관』(『한국사대관』, 『국사대관』)에서 이병도는 조선의 사림과 훈구공신 등 정치세력을 훈구파(勳舊派), 절의파(節義派), 청담파(淸談派), 사림파(士林派)로 구분했다.

 

 

 

 

 

 

 

 

 

 

 

 

 

조선왕조는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단일 왕조로 5백년을 이어간 나라다.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문제가 되는 임금과 관료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임금과 선비를 비롯한 백성이 한마음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은 뛰어난 성과를 만들었다.

 

 

훈구파의 권력독점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도덕성을 회복하는 정치를 하자는 세력이 사람파다.

사림파는 선조 즉위 후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만,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등으로 분열하여 대립한다.

 

 

 

 

조선 시대 초기에 유학을 신봉하는 무리라는 유림(儒林), 선비의 무리라는 사류(士類)와 선비의 집안이라는 사족(士族)으로 불렸다.

사림파는 사족, 사류, 유림보다 더 큰 집단을 의미하며, 정치세력과 재야의 선비세력을 모두 포함한다.

 

 

 

굳이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누어서 그렇지 임금을 보좌한 문무 대신을 이르는 말이다.

소수 무장(武將)을 제외하면, 대다수 사림(士林, 유림儒林)이 공(功)을 쌓아 훈구파가 됐다.

공신세력 훈구파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나라와 임금에게 공을 쌓아서 얻은 벼슬로 세력화하여 권력을 독점하려고 시도하거나, 권력을 독점하면서 여러 폐해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명종 때 윤원형 일파 등 외척세력이 권력을 전횡하였고,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이 죽으면서 사림파 다시 살아난다.

선조 즉위 후는 사람파가 권력의 주도권을 잡았고, 사림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내부분열하였다.

서인 세력이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권력을 잡았고, 서인은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붕당정치의 전개와 폐해 - 동인 서인 남인 북인 노론 소론

http://gdlsg.tistory.com/1572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0일(1392년)

지금은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혹은 고상한 말과 미묘한 이치로써 사류(士類)들을 현혹하기도 하고....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1400년)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여, 종실(宗室), 훈구(勳舊), 대소 신하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함에 힘입어서 태평에 이를까 하였더니....

 

 

 

『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2일(1409년)

양촌(권근)은 국가의 보배요, 유림(儒林)의 사표인데..... 

정탁은 타고난 기질이 참되고 순수하며, 마음잡음이 충후하여 우뚝한 세족(世族) 후손이요, 위대한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라....

고신(告身)을 서경(署經) 하는 법은 비록 아래 사람에게 있으나 오히려 또한 족속(族屬)과 적서(嫡庶)를 분변(分辯)하여서 사류(士類)를 말게 하는데....

전제(田制)를 설정한 것은 본래 사족(士族)을 우대하고 염치를 기르기 위한 것입니다.

경은 태상왕(이성계)의 훈구(勳舊)로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충성을 다하였고....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1월 15일(1423년)

이제부터 산학박사는 사족(士族)의 자제로....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 9월 17일(1458년)

의정부, 육조와 충훈부에서 다시 정인지의 죄를 청하니, 전교하기를

"그날 정인지가 나에게 너라고 칭하며 말하기를, '그같이 하는 것을 모두 나는 취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술이 몹시 취하였다 하더라도, 옛사람이 이르기를, '술에 취하면 그 본정을 드러내 보인다.'라고 하였으니, 정인지가 한 말은 너무 방자하였다. 그러나 훈구(勳舊)이기 때문에 가벼이 벌을 줄 수는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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