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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사미인곡 관동별곡 송강 정철

by 도생(道生) 2017. 1. 15.

서인(西人)의 영수 송강 정철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훈민가(訓民歌)

 

 

 

 

 

 

 

 

 

 

 

 

 

송강 정철(1536~1594)은 사림세력이 본격적으로 정치의 주도세력으로 나선 선조 재위 때 왕성하게 활동했던 정치가이며 학자다.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로 칭송받는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훈민가, 성산별곡 등 많은 가사 작품을 남겼다.

 

 

 

송강 정철은 종5품의 돈녕부판관을 지낸 아버지 정유침과 어머니 죽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은 큰 누이가 조선 9대 왕 인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작은 누이는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의 양자로 들어간 계림군의 부인이 되었다.

 

 

 

 

한양에서 나고 자란 정철은 누이 때문에 어려서 궁 출입이 잦았고 당시 봉림대군(명종, 1534~1567))과 친밀하게 지냈다.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 일파의 소윤세력이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를 일으키면서 집안이 큰 풍파를 겪게 된다.

 

윤원형 등 소윤 세력은 윤임 등 대윤 세력이 인종이 승하하자 계림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음모하였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집안이 완전히 쑥대밭이 된다.

 

 

 

두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형 계림군과 큰 형이 죽고 아버지와 작은 형은 유배를 당했다.

10살의 어린 정철도 아버지의 유배길을 함께 따라갔다.

명종 6년(1551) 임금의 원자가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사면되어 본향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였다.

 

 

 

 

 

 

 

 

 

 

 

 

 

담양에 환벽당이란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던 김윤제(1501~1572)의 문인이 되었다.

김윤제의 환벽당에는 당대 석학이 자주 드나들었고, 정철은 그들로부터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송강 정철에게 가르침을 준 인물은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와 고봉 기대승, 면앙 송순, 석천 임억령 등이다.

송강 정철의 큰 누나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었다.

파주 삼현(三賢)으로 유명한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등과도 교류하였다.

 

 

 

 

 

송강 정철은 명종 16년(1561) 식년시와 명종 17년 별시에 장원급제하며 조정에 출사하였고, 외척세력이 판치던 당시에 큰 부침 없이 관직을 이어갔다. 선조 8년(1575) 사림세력이 동서로 분당할 때 서인(西人)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고 있었고, 서로를 탄핵하는 과정에서 관직을 버리고 한동안 전라도 담양에 내려가 있었다.

 

 

 

 

선조 13년(1580)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관동별곡과 훈민가 등의 가사를 만들었다.

훈민가는 백성을 교화하고 계몽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 관동별곡은 강원도의 관동팔경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이다.

강원도 관찰사 송강 정철은 강원도 영월 땅에 비석도 없이 버려진 비운의 왕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제사를 올렸다.

 

 

선조 18년(1585)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전라도 담양(창평)에서 4년 동안 지낸다.

송강은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 등의 가사를 지으며 세월을 보냈다.

 

 

 

 

 

 

 

 

 

 

 

선조 22년(1589) 10월 1일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한 변서가 조정에 올라온다.

前 판돈녕부사 정철이 임금에게 역적을 체포하여 계엄을 선포하라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송강 정철은 11월 8일에 우의정이 임명되고, 정여립 역모 사건의 위관(委官)에 임명된다.

 

 

 

정여립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긴 사람이다.

10월 1일에 역모 고변이 있었고, 10월 17일에 자결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온다.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약 3년간의 기축옥사 확대되고, 동인을 비롯한 약 1천여 명의 사람이 죽어갔다.

 

기축옥사로 동인은 몰락했고,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다.

1천여 명의 생살(生殺)여탈권을 쥐고 있던 사람은 동인도 서인도 아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던 임금 선조였다.

 

 

 

 

조선왕조실록은 가치도 있지만,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에 의해 사실과 다르게 과장 또는 왜곡된 부분도 있다.  

동인의 영수 이발이 죽을 때 추국청 위관이 서인 정철이었느냐? 아니면 동인 류성룡이었느냐 하는 문제의 논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진짜 모반이었느냐? 아니면 음모였느냐? 하는 문제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선조 24년(1591)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 즉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삭탈관직 되고 유배된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도망가는 선조를 보필했다.

임진왜란 중에 경기, 충청, 전라도 체찰사와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는 등 활동을 하였으나 동인의 모함으로 관직을 버리고 강화도에서 칩거하다 쓸쓸히 생을 마쳤다.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성산별곡의 가사와 100여 편의 시조를 지었다. 

 

 

 

 

 

 

 

 

 

 

 

 

선조실록북인(동인 출신의 강경파)이 권력을 주도할 때 편찬하였고,

선조수정실록서인이 권력을 주도할 때 편찬된 실록이다.

송강 정철은 서인의 영수다.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일(1589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변서(變書)를 올려 전 수찬 정여립이 모반한다.'라고 하였는데, 여립이 망명(亡命, 도주)하였다.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1일(1589년)

판돈녕부사 정철이 숙배한 뒤에 비밀 차자를 올렸는데, 역적을 체포하고 경외를 계엄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임금이) 답하였다.

"충절이 더욱 가상하다. 마땅히 의처하겠다."

 

 

 

『선조실록』 25권, 선조 24년 6월 23일(1591년)

양사가 합계하기를

" 영돈녕 정철 및 백유함, 유공진, 전 검열 이춘영 등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조정의 정사를 탁란시켰으며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모함하려고 호남의 유생들을 꾀었습니다. 그리하여 명경, 사대부 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붙여 섬멸하려고 하였으니, 모두 멀리 찬배시키소서."

정철은 진주로 유배했다.... 정철은 강계로 옮겼다.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21일(1593년)

인성부원군 정철이 졸하였다.

 

사신(사관)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

최영경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하였으니 가수(假手) 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로 있을 때는 인심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1593년)

.... 정철의 자는 계함이고 호는 송강이며 젊어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

김인후, 기대승에게 종학하였는데, 기대승은 자주 그의 결백한 지조를 칭찬하였다.....

 

정철은 평소 지닌 풍조가 쇄락하고 자성이 청랑하며, 집에 있을 때는 효제하고 조정에 벼슬할 때는 결백하였으니, 마땅히 옛사람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인물이다....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三司)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상(將相)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벼슬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주색에 병들어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사(貪邪)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이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귀(權貴)를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역옥을 다스릴 때 당색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으니,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

 

그러나 권간(權奸)과 적신(賊臣)으로 지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철은 조정에서 앉은 자리가 미처 따스해질 겨를도 없이 정승이 된 지는 겨우 1년 남짓하였다. 밝은 임금이 스스로 팔병(八柄,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는 8가지)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산해, 유성룡과 세 사람이 아울러 정승을 하는 상황에서 이산해가 특히 임금의 은총을 입고 있었으니, 정철이 어떻게 권세를 부릴 여지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변론할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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