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

by 도생(道生) 2017. 2. 18.

나라와 동포를 배신한 민족반역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 매국노 역적의 대명사 이완용

 

 

 

 

 

 

 

 

 

 

 

 

 

광복 70년이 넘은 대한민국 곳곳에서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 망령이 활개를 치고 있다.

정체성을 찾지 못한 대한민국은 일제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과 일제의 앞잡이들은 시대를 달리하여 다른 가면을 쓰고 위장하였고, 그 후예들은 근현대 1백여 년의 시간 동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이름을 올렸다.

 

혹자는 나라의 주권을 팔아먹은 을사(1905)년의 다섯 역적, 정미(1907)년의 일곱 역적, 경술(1910)년의 여덟 역적에 각각 이름을 올린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을 한韓민족 역사의 가장 큰 역적, 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역적 중의 역적, 그랜드 슬렘을 달성한 역적, 최고의 역적이라 말한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은 노론의 마지막 당수다.

우암 송시열의 노론율곡 이이의 서인(西人)으부터 비롯됐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은 별 볼 일 없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완용이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남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먼 친척이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부터다.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1821~1901) 역시 이식의 양자로 들어갔고, 판의금부사, 관찰사, 예문관제학, 육조판서, 의정부 참정 등의 관직을 거치며 정1품에 올랐다.

 

 

 

이완용의 양부 이호준은 당파는 노론계열이었고, 흥선대원군 이하응, 풍양 조씨 외척세력 등과 자주 어울렸다.

이호준은 풍양 조씨 세도정치, 흥선대원군, 고종(중전 민씨)의 친정 등 정치 실세가 뒤바뀌는 혼란한 시기에 눈치 하나로 권력을 유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은 1882년(고종 19) 증광시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규장각과 홍문관 등지에서 관직을 수행하다가 1886년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주미 특파전권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다녀온 후 관직에 잠시 있다가 다시 주차미국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

 

 

 

갑신정변, 갑오 동학, 갑오개혁, 을미 사변 등이 일어났을 때 약간의 부침은 있었으나 양아버지의 그늘과 기회주의적인 처세술로 관직을 이어갔다.

 

동부승지, 내부 참의, 성균관 대사성, 형조 참판, 동지의금부사, 전환국총판, 중추원의관, 농상공부대신, 학부대신, 평안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궁내부특진관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한때 친미파, 친러파였던 민족반역자 매국노 역적 이완용은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기세가 높아지자 친일파로 전향한다.

1905년 학부대신 이완용은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겁박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하면서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기 되어 역적의 길로 들어섰다.

 

 

의정부대신 임시서리, 외부대신 서리, 의정부 참정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광산사무국 총재, 내각총리대신, 궁내부대신 서리를 1907년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키는 데 앞장섰고, 정미칠조약을 체결시킴으로써 역적 중의 역적이 된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는 데 앞장서면서 일제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 훈장을 받는다.

 

역적 이완용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척살 당하자 안중근 의사를 비난한다.

1909년 12월 22일 23살의 이재명 의사는 역적 이완용은 처단하려다 실패한다. 이완용은 칼을 맞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 이완용은 우봉 이씨이며 정치적으로는 노론이다.

1926년 2월 11일 역적 이완용은 69살의 나이로 죽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로부터 백작과 후작의 작위까지 받은 자라서 장례행렬은 국상을 방불케 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역적 이완용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누구보다 앞장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등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으며, 무엇보다 조선의 정신과 역사 문화를 말살한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지낸다.

 

 

 

 

 

 

 

 

 

 

 

 

 

역적 이완용은 죽은 후 전혀 연고가 없던 전라도 익산군 낭산면에 묻혔다.

그러나 역적 이완용 묘는 훼묘사건이 계속 일어나자 1979년 자손들이 파묘하여 화장해 버렸다.

 

 

1945년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의해 역적 이완용의 아들 이병길이 체포됐지만, 이승만과 자유당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역적 이완용의 손자 이병주는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일제로부터 받은 재산을 정리하여 밀항하여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증손자 이윤형은 1992년 '조상 땅 찾기' 소송에서 승소하여 땅을 팔아 캐나다로 이민 갔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신한 민족반역자 친일파 매국노 역적들은 대한민국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심판받지 않았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 잔재는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른다.

 

일제가 만든 교육과 역사, 일제가 주입한 정신은 광복 후 70년이 넘도록 우리가 정체성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대한민국은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