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다카시마탄광과 지옥섬 군함도 하시마탄광

by 도생(道生) 2017. 6. 24.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강제노역)의 비참한 삶의 현장 나가사키 해저 탄광

나가사키 앞바다에 있는 지옥섬 고도(高島)의 다카시마 탄광,

지옥섬 군함도(軍艦島, 단도端島)의 하시마 탄광

 

 

 

 

 

 

 

 

 

 

 

 

 

 

 

일본은 19세기 중엽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여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면서 제국주의로 발돋움하였다.

일본 근대화의 핵심 산업으로 크게 철강과 조선, 그리고 석탄산업을 꼽는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의 지쿠호 지역은 일본 최대의 탄광 지역으로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지쿠호 지역의 300여 개 탄광에서 일본 석탄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생산해 냈다.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고 나서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1930년대 말 일본의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고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임금착취, 차별과 폭행,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고, 사고로 희생된 분들이 많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일본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군사기지와 군수산업도시라는 공통점이다.

 

 

일본의 전범 기업 미쓰비시 중공업(나가사키 조선소)은 침략전쟁에 쓰인 일본 전함과 전투기 등의 각종 무기를 만들었고,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될 때 나가사키 조선소 등지에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간 한국인도 많이 희생됐다.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시의 해저 탄광 다카시마(고도高島) 탄광과 지옥섬 군함도(단도端島) 하시마 탄광 역시 미쓰비시 중공업 소유였다.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나가사키 현에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기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온 사람을 합하여 약 7만 5천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가사키 현의 나가사키시에는 약 2만여 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절반 정도가 전범 기업 미쓰비시에서 일했다.

 

 

 

 

 

 

 

 

 

 

 

 

 

 

군함도(軍艦島, 단도端島)보다 조금 큰 섬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고도(高島)에 해저 탄광인 다카시마 탄광이 있었다.

다카시마(고도高島) 탄광은 1695년 석탄이 발견되었고, 외국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1869년부터 석탄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한동안 석탄 채굴이 중지되었다.

 

 

고도(高島, 다카시마)는 본래 3개의 작은 섬이었는데, 세 섬의 물길을 메워서 둘레 6.4km로 넓어졌다.

미쓰비시가 1881년 다카시마 탄광을 인수하여 최초의 근대적 탄광으로 개발한다.

 

다카시마 탄광은 지옥섬 군함도의 하시마 탄광보다 큰 해저 탄광으로 전성기에는 약 1만 8천여 명까지 거주했다고 한다.

일본 근대화의 토대를 구축한 나가사키의 다카시마 탄광은 1986년 폐광됐다.

 

 

 

다카시마(고도高島)와 하시마(단도端島, 군함도) 탄광에 약 4만여 명의 한국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고 추정되고 있고, 중국인도 다카시마 탄광과 지옥섬 군함도의 하시마 해저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군함도(하시마)는 나가사키에 속해 있는 아주 작은 섬으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한국인과 중국인들은 지옥섬으로 불렀다. 

지옥섬 군함도의 본 지명은 단도(端島, 하시마) 그 지역 어민들은 '이소호리'라고 불렀다.

 

 

1810년경 지역 어민들에 의해서 밖으로 노출된 단도(端島, 군함도, 하시마 섬)의 석탄이 처음 발견됐다.

하시마(군함도) 탄광은 막부말기와 메이지유신(1868년) 초기까지만 해도 해저 탄광이 아니었고, 어민들이 부업으로 석탄을 내다 팔았다.

 

 

 

석탄산업은 일본 제국주의 근대화에 한 축을 담당하였고, 1875년부터 단도(端島, 군함도, 하시마 탄광)에서 석탄이 본격적으로 채광된다. 군함도(하시마 탄광)에서 채굴된 양질의 석탄은 제철소의 제철용과 선박 연료용으로 생산되었으며, 1887년 제1 수직 갱도를 파 내려가 해저 탄광이 되었다.

 

 

 

 

 

 

 

 

 

 

 

 

 

1890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 기업 미쓰비시가 군함도 하시마 탄광을 인수하면서 일본 근대산업의 번영을 이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단도(端島, 군함도 하시마)는 길이 320m, 폭 120m의 아주 작은 섬이었다.

군함도(하시마 섬)는 1897년부터 매립을 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초반에는 길이 460m, 폭 160m, 방파제를 쌓고 매립하여 둘레 1.2km가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꾀임과 강제징용(강제노역)으로 끌려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극심한 노동과 고통,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경멸과 차별, 배고픔 속에 생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던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고도(高島) 다카시마 탄광은 생지옥이었고, 하시마 탄광의 군함도는 지옥섬 그 자체였다.

 

해저 탄광 하시마 탄광은 1974년 폐광되면서 군함도는 무인도가 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