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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7

정감록 3대 예언 임진왜란 때 나를 죽이는 자 일본과 나를 살리는 자 명나라 이여송 의 3대 예언 첫 번째 선조 25년(1592)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 때 '나를 죽이는 자' 일본과 '나를 죽이는 자' 명나라 이여송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교활한 전략가' 또는 '처세술의 달인'이라는 평가입니다. 실질적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냈다고 평가받는 오다 노부나가의 시종 출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이후 미천한 출신 성분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일본을 통일합니다. 일본 내에서 전쟁이 끝이질 않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끝냅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 때문에 최고 권력자인 쇼군이 될 수 없어 '관백'과 '태합'의 직에 오릅니다. 평생을 싸움터에서 살았던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땅을 몰수당한 지방 .. 2023. 9. 1.
서애 유성룡 임진왜란 7년 기록 징비록 동인과 남인의 영수 유성룡과 임진왜란 7년의 기록 징비록(懲毖錄) 서애 유성룡(1542~1607)은 퇴계 이황(1502~1570)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75년(선조 8) 사림 세력이 동서로 분당 할 때 퇴계 이황(남명 조식) 계열은 동인(東人)이 되고, 율곡 이이(우계 성혼)의 계열은 서인(西人)이 되었다. 사림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동인과 서인,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로 나뉘었다. 서애 유성룡은 1542년(중종 37) 아버지 유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564년(명종 19)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1566년(명종 21) 별시에 각각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정언, 병조좌랑, 부교리에.. 2017. 1. 16.
남명 조식과 의병장 곽재우 정인홍 김면 칼 찬 선비(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 - 의령의 의병장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합천의 의병장 내암 정인홍 장군,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창녕 조씨 남명 조식(南明 曺植, 1501~1572, 연산군 7년~선조 5년) 선생은 조선 중기 대학자다.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이름 앞에는 칼 찬 선비, 대쪽 같은 선비, 실천 지식인, 조선의 참 선비 등 숱한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우도의 영수였으며,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의 영수로 두 사람은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2016. 11. 19.
임진왜란 의병장과 의병 승병 활동 임진왜란 당시 국란(國亂)극복의 주역 의병장과 의병, 승병 활동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200년 만에 닥친 큰 전쟁, 즉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야반도주했고, 조정 신료들은 임금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함께 도주했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나라와 백성을 버리자 분노한 백성은 궁에 불을 지른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는 왜군에게 조선 관군은 추풍낙엽처럼 연전연패한다. 임진왜란에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라를 구한 대다수의 구국 영웅은 의병장과 의병, 그리고 승병들이다. 이순신 장군, 권율 장군, 김시민 장군 등이 승전할 때 옆에서 조선 관군과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 걸고 활동한 이들이 바로 조선의 백성과 의병, 승병이다. 임진왜란.. 2016. 11. 18.
임진왜란 3대 대첩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산도대첩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7백 척의 왜선에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왜군이 침략해 들어왔다. 4월 21일 대구성 함락, 4월 26일 상주 함락, 4월 27일 문경새재를 넘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이 무너졌다. 왜군은 조선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여 승승장구하며 1592년 5월 3일 한양도성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초기 이후 육상의 조선 군대는 부산진성, 동래성을 빼앗기며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맹장(猛將) 신립장군을 삼도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왜군을 물리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믿었던 신립장군마저 왜군에 패하고 자살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전라.. 2016. 11. 15.
선조 30년,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략한 정유재란 선조 30년(1597년), 일본(왜군)이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략한 정유재란 1592년(선조 25) 일어난 일본의 첫 번째 조선 침략전쟁, 임진왜란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 가도입명假道入明)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 노예전쟁, 살육전쟁, 무역전쟁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년(1597년)에 왜군이 재차, 다시, 거듭, 두 번째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란 의미다. 임진왜란에 이어 일본의 재침략인 정유재란(선조 30)은 그 양상이 달랐다. 조선이 일본의 공격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발발하고 조선이 배제된 상태에서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일본이 재침략한 전쟁이다. 남해안 일대에서 성을 쌓고.. 2016. 11. 14.
임진왜란 역사 속에서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역사 속에서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 조선 수군의 승리,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역사보다 신화에 가깝다. 첫 번째 해전인 옥포에서부터 마지막 해전 노량전투까지, 이순신 장군은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23전 23승이었다. 당대 동아시아 최대 사건이었던 7년 전쟁 임진왜란과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천하명장 충무공 이순신 장군! 23전 23승의 불패의 신화를 만든 이순신 장군 함대의 승리 비결은 무엇일까? 모든 지형지물과 환경을 면밀히 분석해 가장 유리한 시점에서 전투를 감행한 치밀한 전략은 돋보이지만 그것만으로 전승의 결과를 얻기는 힘들다.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어떻게 무적의 함대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당시로선 꿈도 못 꿀 신개념의.. 2014. 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