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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증산도 『도전』 인물열전 - 2. 이마두 마테오리치 신부님은『천주실의』에서 '천주는 곧 상제'라고 하였다.

by 도생(道生) 2015. 7. 1.

증산도 『도전道典』 인물 열전

-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천주실의天主實義』에서 '천주(天主)는 곧 상제(上帝)다.'라고 정의하였다. 

 

 

 

 

 

 

 

 

 

1534년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수사에 의해 창시된 로마 가톨릭 예수회는 당시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과 동양에 기독교(가톨릭)를 전파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1578년 3월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6개월간 악전고투의 항해 끝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의 성 바오로 신학교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신학 수업을 하고 선교 활동을 한다.

 

 

 

가톨릭 선교 활동 중 제국주의적 문화 정책을 쓰고 있는 포르투갈 당국과 기독교 선교 활동도 같은 테두리 속에 속하는 것을 보게 된다. 복음 선교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감, 그리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마테오 리치는 한 달간 심하게 앓는다. 1582년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마카오로 옮겨 중국어 공부와 함께 중국인의 관습과 법 등을 공부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불과 3개월 만에 3년을 공부한 루기에리와 비슷한 실력을 보일 정도였으며, 중국의 정치, 경제, 종교, 풍속 등에 관한 연구를 계속한다. 뛰어난 중국어 한문 실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문서 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쇄국 정책으로 원칙적으로 외국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가 지도와 자명종, 지구의 등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수학에 능하다는 소문이나자 조경(肇慶)의 지부사(知府使) 왕반(王泮)의 초청으로 조경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제작된 세계지도 제작은 1602년 곤여만국전도 제3판 발행까지 계속된다. 이 지도가 나옴으로써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 외 나라들은 오랑캐라는 오만방자한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인식, 세계관을 심어주게 된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중국의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중국어로 기독교(가톨릭) 교리 문답서를 쓰고, 한문으로 된 『교우론』을 저술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가톨릭 예수회 중국 선교 책임자가 된다.

이후 남경에 정착한 마테오 리치 신부는 그 지역의 고관 명사들에게 천문과 지리와 수학 등을 가르친다.

 

 

 

드디어 1601년 중국 황제의 만난 마테오 리치 신부는 북경 거주 허가를 받게 되고, 1603년 한자로 된 교리 문답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천주님의 참뜻)를 출간하게 된다.

 

이마두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 『천주실의天主實義』(De Deo Verax Disputatio - 하느님에 관한 참된 논의)에서

기독교(가톨릭)와 중국의 사상을 대비시켜 양자가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라는 의견을 정리하였다.

 

 

신종 황제의 호의로 선무문(宣武門) 안에 천주당(중국에서 천주교회를 가리키는 말)을 세워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 1605년 베이징에 200여 명의 신도를 만들어 '천주교'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예수회에서는 '위에서 아래로의 전도'라고 하여 상위계급이나 지식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 복음이 확대되게 하려는 전도방법을 갖고 있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비록 명나라 황제 만력제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나라의 쇠락을 걱정하는 개혁파 사대부들과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서광계(1562~1633), 이지조(1565~1630), 양정균(1562~1627) 등 일부 사대부 지식인들은 기독교인이 된다.

 

 

 

 

 

 

 

 

 

그는 서광계, 이지조의 협력을 얻어 과학기술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천주교 서적을 저작하는 등, 나머지 일생을 중국에서 활약하였다. 이처럼 와성한 활동을 한 이마두 마테오 리치 신부는 조선 실학파 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되며, 1609년 중국 최초로 "성모 마리아회"를 창립하였고, 이듬해 1610년 58세에 별세하여 베이징에 묻혔다.

 

 

 

 

 

 

 

 

이 모든 찬사는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의 종교인, 이마두 마테오 리치 신부님이다.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 16세기 말, 가톨릭의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건너와서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중국 선교에 온 생애를 바치셨다. 가톨릭 선교사로서 신부님은, 개인적 선교 업적에 구애받지 않고, 어떻게 하면 동서양이 인종과 문화적 편견을 넘어 천국 건설의 이념하에 하나로 화합할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실천하셨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과학 지식과 문물을 번역해 동양에 알리고 전했으며, 또 동양의 최고 엘리트와의 교분을 통해 배운 사상철학을 서양에 번역해 알리는 등, 동서양 문명 교류와 융합에 불멸의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하나의 문화 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해 온 개인이,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 위대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모범적 사례를 마테오 리치 신부님은 직접 실증해 보여주셨다. 신부님은 종교인으로서, 자기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살다 가신 것이 아니다. 하늘이 주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신부님은 인류 보편의 이념을 위해 한 생애를 살다 가신 것이다.

 

 

마테오 리치, 이마두 신부님의 남긴 업적에 비해, 이 세상은 아직 신부님의 생애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계속)

 

 

 

 

 

 

 

 

 

천지신명이 받드는 마테오 리치 대성사

 

1 이마두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은 그를 떠받드나니

2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3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라.

4 이마두가 24절(節)의 역(曆)을 개정하여 때(時)를 밝히매 백성들이 그 덕(德)을 입어 왔으나

5 이 뒤로는 분각(分刻)이 나리니 분각은 우리가 쓰리라.

6 이마두는 보민신(保民神)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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