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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연인,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 오드리 헵번 명언

by 도생(道生) 2015. 7. 25.

남성에게는 만인의 연인이었으며, 여성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으로모습보다 내면이 더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 명언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던 만인의 연인 오드리 헵번의 미소 뒤에는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었다.

네델란드의 부유한 집안(남작부인)의 딸인 어머니와 영국(또는 아일랜드) 출신의 실업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남부럽지 않게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이 불과 6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가족을 떠나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집안은 갑자기 몰락하고 만다.

 

 

 

 

 

 

 

헵번의 어머니는 한때 나치즘에 빠졌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며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한다.

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의 궁핍한 생활을 하던 오드리 헵번은 5살부터 배우던 발레를 전쟁통에서도 계속 익힌다.

 

 

 

 

 

 

 

 

 

그렇게 배운 발레는 그녀가 세계적인 배우가 되는 기반이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연기에 도전하였고, 1951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면서 그녀의 인생에도 활짝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그녀를 은막의 여왕으로 만든 '로마의 휴일'(1953)에 출연하면서 오드리 헵번은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오드리 헵번은 최고 전성기에 출연 제의가 들어온 안네의 일기를 끝내 고사하고 만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나치 활동이 언제나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그녀는 자신의 나이(1929년생)와 같고 당시 생활상도 비슷한 '안네의 일기'에 차마 출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픔은 유니세프 활동을 통해 부모님의 지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대신 갚아 나간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에 헌신과 봉사로 보답한다.   

 

 

 

 

 

 

 

우연히 아버지부터 온 편지를 보게 된 오드리 헵번은 1959년 적십자를 통해 아버지의 근황을 알게 된다.

나치 전범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아버지는 극심한 가난과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난 헵번은 직접 모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경제적으로 생활을 책임졌다.

 

오드리 헵번이 자신이 사망하지 약 3년 전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을 조금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배우였지만 언제나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1950년대 중반부터 유니세프에 기부를 해왔으며,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유니세프와 협력활동을 하였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에 임명되었으며 지속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다가 1993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 오드리 헵번.

지독한 가난으로 굷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지구촌의 아이들을 위해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구호활동을 하였던 만인의 여인 오드리 헵번, 그녀가 사망한 1993년 1월 21일은 미국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취임식보다 오드리 헵번의 사망 소식을 먼저 전하며 그녀의 헌신과 봉사의 삶을 기렸다.

 

 

 

 

 

 

 

 

 

 

오드리 헵번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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