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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총리 명언

by 도생(道生) 2015. 9. 19.

'악랄한 마녀' & '철(鐵)의 여인', 비난과 찬사를 받으며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리는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총리 명언

 

 

 

 

 

 

 

 

마가렛 대처(1925년~2013년) 前 영국 총리는 아버지가 남겨준 정치적(권력) 유산이나 금전적 유산도 없다. 

마가렛 대처는 영국의 링컨셔 주 그랜샘 지역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소도시 그랜샘에서 시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영국 총리였던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간에 늘 따라다닌 말이 '식료품집 딸'이라는 수식어였다.

전자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의미의 칭찬하는 말로, 후자는 우습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업신여김이었다.

 

 

 

 

 

 

 

 

'철의 여인'이란 찬사와 함께 '악랄한 마녀'란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총리는 국민에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영국을 일으키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의 오만적이고 독선적인 통치방식은 너무 많은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고 그로 인해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로에게 신념과 철학, 사회와 정치적인(보수주의적 사고)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즘(전체주의)에 증오심도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녀 스스로도 인간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할 정도였다.

 

 

 

 

 

 

 

 

영국의 명문 대학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26살에 성공한 사업가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고 29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쌍둥이의 엄마와 한 남자의 아내, 가정주부로 살던 마가렛 대처는 34살에 영국 하원의원(보수당)에 당선된다. 

그녀의 정치 인생에서 여성적인 면보다는 강력하고 열정적인 면이 많아 보였다.

 

마가렛 대처 前 총리는 정치에 입문하고 불과 2년 후에 연금과 국가보험 차관, 노동부 장관, 교육부 장관, 과학부 장관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자신의 신념과 자신만의 철칙을 가지고 반대 세력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인다.

 

 

 

 

 

 

 

 

마가렛 대처는 만 50세가 되던 1975년 여성 최초로 영국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었고, 1979년 영국 총리에 당선된다.

식료품집 딸이 지구촌 여성 글로벌 리더로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구(西毆) 최초로 여성이 국가를 통치하는 길을 활짝 여는 순간이었다.

 

인류 역사가 그랬고 당시도 지구촌 전역이 남성 중심의 정치사회였기 때문에 보통 능력과 강심장이 아닌 이상 쉽게 넘을 수 없는 금녀의 벽을 과감하게 허물고 드센 남자에게 절대 위축되거나 밀리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지난날 대영제국의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비용 저효율의 소위 영국병을 앓으며 암울한 경제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마가렛 대처 총리는 국유화를 민영화로, 복지정책을 포기와 공공지출 삭감, 기업의 활동자유 보장(규제완화)과 세금인하, 노동법 개정으로 파업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면 노조에 배상책임을 묻는 등 기업 친화적인 자유시장 경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임에는 분명하였으나 독단적이고 봉건주의 시대 절대 군주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에 모교인 옥스포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가 학내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철의 여인으로서 마가렛 총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82년 아르헨티나 앞에 있는 섬 영국령 포틀랜드 제도에서 벌어진 일명 포틀랜드 전쟁에서 잘 나타난다. 영국의 국가 수장으로서 영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영국 총리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마가렛 대처 총리가 집권하기 전 영국의 70년대 평균 경제성장률이 2.1%였고, 대처 총리가 집권한 후 십여 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은 2.46%였다. 그리고 대처 총리가 집권할 때 실업률이 5.5%인 반면 대처가 퇴임할 때는 실업률이 7.5%에 육박하였다.

 

 

 

 

 

 

 

 

마가렛 대처 前 총리가 사망하기 전에도 이미 분열된 영국 사회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마가렛 대처 前 총리에 대한 추도사 수위를 조절할 정도였다.

 

그녀를 '철의 여인', '영국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찬사를 보내며 칭송하는 사람도 많고, '악랄한 마녀', '쓰레기' 등으로 그녀를 증오하매 비난하는 영국 국민도 많다. 영국 총리로서 마가렛 대처 악랄한 마녀& 철의 여인으로 국민 사이에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린 영국의 여성 정치지도자였다.

 

 

 

 

 

 

 

 

집권 후반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주택보급률이 떨어지며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하며 노동자와 서민계층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고,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그녀가 시행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시행한 영국 경제 재생 정책을 일명 대처리즘(대처주의)이라 한다.

 

 

 

 

 

 

마가렛 대처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끊임없는 노력, 자신의 소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빠른 판단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글로벌 여성 리더였다. 

 

중산층의 지지를 받으며 여성으로서 영국 총리를 3선 연임하며 11년 6개월 동안 영국을 움직인 마가렛 대처 총리는 영국 보수당 새 당수 1차 표결에서 패하며 총리직을 사임하였으나 이후로도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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