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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버마) 민주화의 꽃 아웅산 수치 여사 명언

by 도생(道生) 2015. 11. 15.

53년 군사독재국가 미얀마(버마)의 민주화의 꽃 아웅산 수치 여사 명언

 

 

 

 

 

 

 

 

 

미얀마(버마)는 불교 국가로 국민의 절대다수가 불교도이며 지구촌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중의 하나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기부와 자원봉사를 하는 나라 1위로 국민의 91%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의 '세계 기부 지수 2015' 보고서가 발표됐다. 이는 불교를 신앙하는 국민 다수가 승려와 사원에 기부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약 5,500만 명 국민 중 90%가 불교도이고 약 70%가 버마족이며 나머지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소승불교 국가, 130여 개의 민족과 100여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 미얀마(버마)는 민족과 종교 갈등이 심하다.

 

특히 이슬람을 신앙하는 미얀마(버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의 탄압과 인권문제에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으나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얀마의 종교와 민족 갈등의 중심에는 미얀마(버마)의 승려이며 불교 극단주의 세력 마바타(인종 종교 수호협회)의 대표적인 인물 위라투가 있다.

 

 

 

 

 

 

 

 

아웅산 수치(1945년 ~ ) 여사는 강인한 공작새, 민주화의 꽃, 철의 난초, 여성 만델라 등의 수식어가 붙는 미얀마(버마)의 민주화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버마(미얀마) 독립의 아버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보죠케 아웅산(1915 ~ 1947) 장군과 장관과 외교관으로 인도 대사를 지낸 어머니 킨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웅산 수치는 불과 세 살 때 영국의 식민지에서 버마(미얀마)의 완전 독립(1948년)을 목전에 둔 1947년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하게 된다.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는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간 아웅산 수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형제를 낳는다.

 

 

 

 

 

 

 

 

1988년 4월 어머니 킨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귀국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군사독재정권의 총칼 아래 수천 명이 무참하게 희생되는 조국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버마(미얀마)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운동'을 계기로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민족민주동맹(NLD)을 결성한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50만 명의 민주화 시위대가 운집한 가운데 1988년 8월 26일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딸로서 버마(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할 수 없다며, 이 위대한 투쟁은 온전한 민주주의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강렬하고 깊은 열망에서 시작됐다는 연설과 함께 그녀는 버마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1989년 7월 20일 1차 가택연금을 당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를 떠나면 자유를 주겠다는 군부독재의 조건을 단호히 거절한다.

1990년 버마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두지만 군부독재 정권은 선거를 무효화시킨다.

군사정부는 나라 이름을 버마에서 과거에 사용하였던 미얀마로 바꾼다.

 

1991년 아웅산 수치 여사는 미얀마(버마) 민주화 운동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가택연금으로 직접 수상하지 못한다.

 수치 여사의 남편은 마이클 에어리스는 부인을 대신하여 노벨평화상과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는다.

 

 

 

 

 

 

 

 

1995년 1차 가택연금 해제가 되었다가 2000년 9월 2차 가택연금이 되었고, 2002년 5월 2차 가택연금 해제 후 1년이 지난 2003년 5월 3차 가택연금을 당한다. 2007년 8월에 버마(미얀마)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2009년 8월 18개월의 가택연금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2010년 11월 13일 가택연금 선고가 종료된다.

 

1999년 3월 1일 남편이 영국에서 사망하였을 때 출국하면 버마의 민주화 상징이 된 수치 여사는 입국이 거부당할 것을 우려해 남편의 장례식도 참여하지 않았다. 수치 여사는 "나는 항상 내 바람을 이해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진정 행복한 여자였다. 그 무엇도 내게서 남편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라고 남편이 사망한 날 일기에 썼다. 또 지난 2010년 7년간의 가택연금에서 벗어나 10년 동안 미얀마(버마) 입국을 거부당한 아들 킴 에어리스와 10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기도 했다. 

 

 

 

 

 

 

 

 

미얀마(버마) 대통령 선출은 상원과 하원, 군부에서 각 1명씩을 대통령 후보를 추천하여 최고 득표자가 대통령에 선출되고 나머지 2명은 부통령이 되는 구조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미얀마(버마) 제1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군부의 166석을 포함한 전체 664석 가운데 과반(過半, 절반 이상) 의석을 확보하며 미얀마(버마) 제1당으로 단독정부 구성과 대통령을 배출에 필요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여사는 현행 미얀마(버마) 헌법상 대통령이 될 수 없다. 2008년 미얀마(버마) 군부에 의해 개정된 헌법 59조는 외국인 배우자나 외국 국적 자녀를 둔 사람이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수치 여사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헌법 개정은 의원 정족수 75%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미얀마 군부는 2008년 국회 664석 가운데 군부가 선거와 관계없이 25%인 166석을 의무적으로 배정하게 헌법을 개정했다.

더욱이 국가의 핵심 부처인 국방과 내무, 국경 경비 장관에 대한 임명권을 군부가 갖고 있어서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다. 

 

 

 

 

 

 

 

 

미얀마 민주화의 어머니 아웅산 수치 여사가 대표로 있는 민주주의 민족동맹이 총선에서 승리하였지만, 미얀마의 실질적인 정치력은 군부가 쥐고 있기 때문에 그리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근 30년 가까운 민주화 투쟁과 국민의 희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미얀마의 봄이 밝아 오고 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여사가 미얀마의 이슬람교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의 인권 탄압, 민족과 종교 차별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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