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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계종 조계사 대웅전 - 보천교 십일전

by 도생(道生) 2015. 12. 24.

대한민국 불교 최대의 종단,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과 보천교(普天敎) 십일전

 

 

 

 

 

 

 

 

 

 

 

 

세상에서 흔히 쓰는 유사(類似)종교, 사이비(似而非) 종교란 말의 시작은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는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한반도 독립운동의 근원지를 없애고 한韓민족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제일의 종교 단체 보천교를 해체 시키고 우리의 문화를 없애고 격하시킨다.

 

 

 

 

 

 

 

 

 

 

 

일본 제국주의는 당시 아시아에서 최대의 위용을 자랑했고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던 보천교 십일전(十一殿)과 부속 건물을 허물어 버렸고, 1만 8,000근짜리 종도 해체하였다.

 

보천교 자리가 있던 전라북도 정읍시 대흥리에는 아직도 남아 주춧돌이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기록으로 600만 명을 넘는 보천교 신도들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뿔뿔이 흩어지고 지하로 숨어들어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 흔적이 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항일운동,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보천교 600만 명이 있었다.

보천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 총독으로 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1926년 직접 정읍의 보천교를 방문하여 차경석 성도와 면담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은 광복 후 정읍을 방문하여 "정읍에 빚을 많이 졌다."라고 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도 광복 후 정읍을 방문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른바 '정읍발언'한다.

 

광복 후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이 모두 정읍을 방문하였고, 당시 최대의 이슈였던 이승만의 정읍발언까지 서울이 아닌 전라북도 정읍에서 하였다.

 

 

 

 

 

 

 

 

 

 

독립운동이 나라밖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수많은 동포와 함께 보천교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일제의 강압에 기성 종교지도자들이 하나 둘 굴복하였지만 보천교는 단 한 명의 변절자가 없는 종교단체로 남았다.

 

 

 

 

 

 

 

 

 

 

 

 

1918년 제주도에서 보천교 신도들의 투쟁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항일운동이었으며, 400여 명이 인원이 관계된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1992년 당시 재판 기록과 수형인 명부가 발견되어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기념탑이 건립됨)

 

 

 

 

 

(1938년 대웅전 공사 사진)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있던 단체 중에 최대의 종교 조직, 보천교는 일제가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몰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1938년 보천교 십일전의 일부를 가져와 지은 것이 당시의 태고사(太古寺),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 대웅전이다.

 

 

 

 

 

 

 

 

 

 

보천교는 증산 상제님의 유훈을 받들어 1911(신해)년 태모 고수부님께서 포정소(布政所) 문을 여시고, 정읍 대흥리 차경석 성도의 집을 본소(本所)로 정하시고 도장 개창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불과 3년 만에 신도들이 구름 일듯이 모여들었으며, 특히 삼남(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지방에서 태을주 주문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루는 성도들이 태모님께 여쭈기를 "교 이름(敎名)을 무엇으로 정하시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천하를 통일하는 도(道)인데 아직은 때가 이르니 '선도(仙道)라고 하라. 후일에 진법(眞法)이 나오면 알게 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1:29:1~2))

 

 

도세(道勢)가 커지고 통교권(統敎權)을 장악한 차경석 성도가 1921년 '보화교(普化敎)'를 선포하였고, 1922년 조선총독부에 등록하는 과정에서 보천교(普天敎)로 등록하게 되었다.

 

 

 

 

 

 

 

 

 

 

(차)경석의 집 벽에

천고춘추아방궁(千古春秋阿房宮)이요 만방일월동작대(萬方日月銅雀臺)라.

라고 써 붙이시며 경석으로 하여금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게 하시고

또 경계하여 말씀하시기를 "경석아, 집을 크게 짓지는 말아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정읍이 대창(大昌) 하되 잠농기운(蠶農之運)이라. 누에는 집만 지으면 죽나니 집만 끝이 나면 죽으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 3:187)

 

 

 

 

 

 

 

 

 

"경석이 성경신(誠敬信)이 지극하므로 달리 써 볼까 하였으나 제가 스스로 청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다.

지난 갑오(1894)년 동학 신도들이 여러 만 명 학살되어 모두 지극히 원통한 원귀(寃鬼)가 되어 우주간에 나붓거리는지라.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

 

마음으로 각기 왕후장상(王候將相)을 바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릇 죽은 자가 수만 명이니

그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후천에 역도(逆度)에 걸려 반역과 화란이 자주 일어나 정사(政事)를 못 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를 스스로 청함이라.

이제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이리라." 하시고

 

"그 부친이 동학 접주로 그릇 죽었고 경석도 또한 동학 총대(總代)였으니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恨)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

 

"춘치자명(春稚自鳴)의 설화(設話)를 들어 보라.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차)경석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1894)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니라.

경석에게 밥주걱을 맡겼나니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5:20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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