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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환단고기와 사마천 사기 - 황제헌원과 치우천황

by 도생(道生) 2016. 5. 17.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韓민족 역사 왜곡

동북아 5대 역사 조작극 - 사마천 사기史記 금살치우(擒殺蚩尤)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과 환단고기의 배달국 치우천황

 

 

 

 

 

 

 

 

 

 

 

 

전한(前漢)시대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흔히 동양을 대표하는 역사서라고 말합니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로 시작하며 첫 페이지에는 중국 한漢족의 조상, 중국의 역사 시조로 받들어 온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등장합니다.

 

 

지구촌 대다수 학자가 동양을 대표하는 역사서라고 말하는 사마천 사기는 첫 페이지부터 역사를 왜곡과 날조로 시작합니다.

 

사마천 사기는 한나라 무제(武帝)가 북부여를 침공하였다가 북부여 고두막한(동명성왕) 단군에게 참패한 후 돌아가 사관(사마천)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중국의 역사 시조 황제 헌원과 배달국 14대 자오지 천황(치우천황)은 지금으로부터 약 4,700여 년 전 실재한 중국과 한韓민족의 조상입니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는 헌원의 출생과 성장 배경을 짧게 기록하고 배달국 치우천황과 한漢족 황제 헌원과의 탁록대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북아의 주도권 다툼 전쟁 탁록대전을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듣지 않자 이에 황제는 제후들로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중국 시헌원과 치우천황의 탁록대전의 핵심은 '금살치우(擒殺蚩尤, 치우를 잡아 죽였다)'입니다.

 

 

 

 

 

 

 

 

 

 

 

 

중국 한漢족의 역사 시작, 중국의 시조 헌원이 난을 일으킨 불의한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사마천의 『사기』 주석서 가운데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삼가(三家) 주석(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에는 '금살치우'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남송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장수절의 사기정의史記正義, 당나라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나온 치우천황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송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응소왈치우고천자(應曰蚩尤古天子), 응소가 치우는 옛 천자라고 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나라 장수절의 사시정의史記正義에는 '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큰활)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관자는 치우가 노산(盧山)의 금(金, 쇠)을 얻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가 사로잡아 죽였다.'라는 금살치우의 내용과는 전혀 상반되는 기록입니다.

 

 

 

 

 

 

 

 

 

 

 

동북아 주도권을 둘러싼 배달국 치우천황(자오지 천황)과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과 탁록대전의 진실은 한漢족의 우두머리였던 헌원이 배달국 치우천황과의 전쟁에서 이겨 동방의 진정한 천자(天子, 황제皇)가 되려는 욕심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탁록대전은 10년 전쟁 끝에 치우천황께서 헌원을 이겨 제후로 삼았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사마천 사기에 기록된 '금살치우擒殺蚩尤'라는 대목은 역사적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한 사마천 사기는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을 동북아의 주도권을 쥔 천자(天子)로 만들어 중국 역사의 시작이 동북아의 중심 나라였다고 못 박기 위해 '금살치우'라는 역사 조작이 필요했습니다.

 

 

 

 

 

 

 

 

 

 

 

동북아의 주도권을 쥔 천자(天子)로서 병법의 시조이며 한韓민족의 위대한 선조 배달국 치우천황의 존재를 말살하기 위해 사마천은 사기를 역사를 왜곡하였습니다. 치우천황을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진 인물,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묘사하는 등 인격 말살을 한 뒤 금살치우로 역사 왜곡의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중국의 시조, 중국 역사의 시작, 중국 한漢족의 조상 헌원은 대요(大堯, 요임금), 창힐(倉詰) 등과 함께 동방 천자의 나라 배달국의 제후국이었습니다.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자오지 천황)의 국사(國師)이며, 동방의 대선인(大仙人) 자부 선생에게 배달국의 신교(神敎)문화와 철학을 받아 탁록에서 서방 한漢족의 문화 체계를 세웠습니다. 탁록은 중국 한漢족 문명과 역사의 실제 발원지입니다.

 

 

 

 

 

 

 

 

 

 

사마천 『사기』에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지구촌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배달국 치우천황을 중국 한漢족의 조상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배달국 신시 시대 말기에 치우천황이 계시어 청구(靑邱)를 널리 개척하셨다.

환단고기』 - 성기

 

 

치우천황(14세 환웅, 자오지환웅)께서 영토를 개척하고, 구리와 철을 캐어 무기를 제조하는 한편 병사를 훈련시키고 산업(興産)을 일으키셨다.

환단고기 - 삼성기

 

 

 

 

 

 

 

 

 

 

 

14세 자오지환웅이 계셨는데, 이분은 신이한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구리와 철로 투구를 만들어 쓰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구치를 제작하여 광석을 캐내고 철을 주조하여 무기를 만드시니 천하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분을 치우천황이라 불렀는데, 속언에 치우는 '뇌우가 크게 일어 산하가 뒤바뀐다.'는 뜻이다.

환단고기』 - 삼성기

 

 

 

치우(14세 환웅)천황이 등극하여 구치(九治, 채광 기계)를 만들어서 구리와 철을 캐시고, 철을 단련하여 칼과 창과 큰 쇠뇌를 만들게 하셨다. 사냥을 가거나 전쟁을 할 때 이것에 신처럼 의지하니, 주위 모든 부족이 대궁의 위력을 몹시 두려워하여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진 지 오래다.

환단고기』 - 신시본기

 

 

 

 

 

 

 

 

 

 

 

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中

 

 

14세 자오지천황(치우천황)은 약 4천7백 년 전 요서를 넘어 산동성과 그 주변을 물론 서쪽으로 탁록까지 진출하여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성웅(聖雄)이다.

 

치우천황의 재위 초기, 신농국이 8대 유망(楡罔)에 이르러 쇠퇴의 길을 걷자, 서방으로 출정하여 지금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을 배달의 영토로 흡수하였다. 그런데 그 틈을 타 서토 지역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이 치우천황을 밀어내고 동북아의 천자가 되려고 일어났다.

 

 

이에 급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온 치우천황은, 탁록 벌판에서 헌원의 군대와 맞서 10년 동안 73회의 접전을 치러 마침내 헌원을 굴복시키고 제후로 삼았다. 나아가 넓어진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서토에 가까운 청구(靑邱, 현 대릉하 유역)로 옮겨 배달의 새 시대를 열었다.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법력과 위용을 떨친 치우는 배달 이후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은 물론 중국 백성들에게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진한 시대 중국인들은 해마다 10월이면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치우기蚩尤旗)'이 천황의 능에서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 - 태백일사, 규원사화 등 국내 사서만이 아니라, 사기』, 천관서』, 사시집해 등 중국 기록에도 나타난다.

 

 

중국 백성들만이 아니라 중국 황제들도 치우천황을 숭상하였다.

초한전으로 유명한 한 고조 유방은 치우천황 전각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싸움에 나가, 진秦의 수도 함양을 평정하였다. 4년 후 진나라 땅을 완전히 평정하였을 때, 유방은 장안(長安)에 치우의 사당까지 지어 치우천황을 돈독히 공경하였다.

(『환단고기 - 태백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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