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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환단고기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금서룡이 조작한 한사군 위치

by 도생(道生) 2016. 5. 31.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韓민족 역사 왜곡

동북아 역사 5대 조작극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금서룡(이마니시 류)이 조작한 한사군 위치

환단고기 - ② 한사군은 중국이 밑돌을 깔고 일본이 못 박은 조작된 역사

 

 

 

 

 

 

 

 

 

 

 

 

번조선을 찬탈한 도적 위만(정권)의 손자 우거(정권)는 한漢나라 무제의 군사에 의해 죽지 않았습니다.

번조선의 내부 분열로 말미암아 살해당했습니다.

 

 

 

한漢나라의 사관史官 사마천은 역사 현장을 꼼꼼하게 확인하여 기록했다고 하였으므로 한漢나라와 위만 정권(일본과 중국은 위만조선이라 주장)과의 전쟁을 직접 목격하여  당시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재 역사와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漢나라가 참패하다시피한 전쟁의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단지 두리뭉실하게 기록하였으며, 또 있지도 않았던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의 한사군(漢四郡) 지명과 위치를 사기史記 기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장수절의 사기정의와 배인의 사기집해 등 중국 역사서에 한사군이 나오고 있습니다.

 

 

근거와 실체가 없고 서로 다른 한사군 역사를 사실로 만들기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는 랑케의 실증주의를 수용하여 한사군 한반도 설의 식민사관 역사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동북아 5대 역사 조작극 -

일제 식민사관의 한국 고대사 역사 조작 한사군 한반도 설

 

한漢 무제 때 사관 사마천의 사기에 없는 한사군 한반도 설

http://gdlsg.tistory.com/1417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온갖 찬사를 받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사군의 위치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마천이 죽고 수백 년이 지나 나온 중국의 역사서, 그것도 2군, 3군, 4군 등으로 내용과 군(郡)의 숫자가 서로 엇갈린 기록을 바탕으로 낙랑, 임둔, 진번, 현도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망령(亡靈)된 주장은 중화 사대주의 사상에 물든 자들에 의해 떠돌다 급기야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금서룡(이마니시 류)이 한사군 한반도 설을 만들어 역사를 조작합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금서룡(이마니시 류) 한漢나라가 세운 한사군 위치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자신이 직접 평안도에서 발굴하였다고 주장하는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입니다.

 

 

 

 

 

 

 

 

 

 

점제현신사비에는 백성을 위해 점제현의 우두머리가 산신제를 지낸 내용이 적힌 비석으로 점제현은 (북한) 평안도 용강군(현 온천군)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마천의 』에는 낙랑군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기』보다 근 200년 후에 나온 한서 지리지」의 기록을 내세우며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의 속현으로 점제현이 나오는데 한사군의 낙랑군은 한반도에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고 단정한 것입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에 2천 년 동안 서 있던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를 금서룡(이마니시 류)이 발견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하였고 오직 자신만이 한 번에 알아봤다는 개가 웃을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금서룡은 평양 일대의 한사군 위치 조작은 점제현신사비에 그치지 않고 한漢나라 기와(瓦)와 봉니(封泥)까지 발견하였다고 유물을 조작합니다.

 

 

점제현신사비 발견과 한나라 기와, 봉니의 발견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학이 조작한 역사입니다.

대한민국 주류 강단사학계는 금서룡이 조작한 한사군 한반도(낙랑군 평양) 설을 실제 역사로 둔갑시켰습니다. 

 

 

"한사군은 중국이 밑돌을 깔고 일본이 못 박은 조작된 역사"

(이덕일 박사)

 

 

 

 

 

 

 

 

 

 

 

 

일본 제국주의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금서룡이 조작한 한사군의 위치는 사마천 사기 원문이 아닌 후대에 쓰인 『한서』 등을 근거로 한 것이고, 그 내용도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써 누구도 한사군 위치가 한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우거(위만) 괴뢰정권이 전쟁의 당사자였던 한漢나라가 아닌 번조선 백성에 의해 무너졌다고 하였으며, 한사군의 위치 낙랑, 임둔, 진번, 현도은 그 기록조차 없습니다.

 

 

전쟁 승리에 기여한 번조선의 백성 5명을 제후로 봉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한漢나라 육군과 해군 사령관에 해당하는 장군과 사신을 한나라 황제 무제(유철)의 치욕의 전쟁사를 소위 중화 중심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기록하였습니다.

 

  

한나라 무제 때 한사군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냐 중국이냐 하는 그 의미 자체가 없습니다.

 

 

 

 

 

 

 

 

 

 

환단고기 해제가 전하는 한사군 위치 조작의 실체

 

 

 

4군(四郡)의 구체적 명칭은 사마천이 죽고 백 년이 더 지나서, 중화(中華) 사관이 뚜렷한 반고가 쓴 한서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서의 기록도 한사군의 실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무제본기는 "우거의 목을 베고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4군을 모두 적었다.

그러나 지리지는 "낙랑과 현도는 무제 때 설치되었다."라고 하여 2군을, 오행지五行志는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3군을 열었다."라며 3군을 기록하였으므로, 군의 수가 서로 어긋난다.

 

 

 

중국 사서의 일관성 없는 기록은 한사군에 대한 사기의 그 짤막한 기록이 과연 사마천 자신의 서술인지 의문마저 들게 한다.

사기의 이 구절은 후대의 열사 학자가 삽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사군이란 것이 설치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마천은 한사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것이다.

 

 

그 진실을 우리는 환단고기에 수록된 북부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한사군은 한나라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 결코 실현된 적이 없었다.

(환단고기 해제 542쪽)

 

 

 

 

 

 

 

 

 

 

 

 

봉니(封泥)

봉니는 고대 중국에서 문서를 운송하는 도중에 다른 사람이 보거나 위조하지 못하도록 한 표식이다.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을 묶은 노끈 매듭에 진흙을 덩어리로 만들어 봉한 뒤 진흙 덩어리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봉니에는 관직 이름이나 지명이 찍혀 있어서 그것을 보낸 곳과 보낸 이의 관직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봉니는 문서를 보낸 곳이 아닌 받는 곳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는 평양 지역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200여 개의 봉니에 낙랑(樂浪)이란 글자가 새겨진 것을 근거로 평양에 한나라의 낙랑군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봉니에 찍힌 '낙랑'은 문서를 보낸 지역명인데, 그런 봉니가 어떻게 낙랑 땅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더구나 평양 땅에서는 다른 군으로부터 받은 봉니가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평양 땅의 봉니 출토는 그곳을 한사군 지역으로 조작하기 위한 일제의 자작극인 것이다.

(환단고기 해제 5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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