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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한무제와 북부여 고두막한(동명성왕)의 동북아 영토 전쟁

by 도생(道生) 2016. 6. 10.

한나라 황제 무제(유철)와 북부여 고두막한(동명성왕) 단군의 동북아 영토 전쟁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잘못됐을까요?

북부여 역사를 얼마나 왜곡시켜 놓았는지 크게 잘못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과 현손(玄孫, 4대손)되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와의 관계를 부자(父子)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본래 동명성왕으로 불린 분은 북부여 5세 고두막한 단군인데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한나라 무제(유철)가 북부여를 침공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려다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에게 참패하여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한나라 무제의 사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하지도 않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를 중국과 일제 식민사학은 한반도에 갖다 놓았습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를 예맥이 만든 국가라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합니다.

 

 

 

 

 

 

 

 

 

 

 

 

 

한漢나라 무제의 동북아 영토 전쟁 시작

 

 

한漢나라 무제(유철)은 우거 정권(위만의 손자)을 무너트리기 위해 쳐들어옵니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연패를 당합니다. 1년 넘게 계속된 전쟁에서 우거 정권의 내부 분열과 이간책으로 한漢나라 무제는 결국 우거 정권(옛 번조선)을 점령합니다.

 

한무제는 한漢나라의 군현을 설치하려다 우거 제거에 공을 세운 한韓민족의 강한 저항에 번조선(위만이 침탈한 고조선의 변방) 유민들의 자치를 인정하는데 그쳐야 했습니다.

 

 

 

 

 

 

 

 

 

 

 

 

북부여 역사 왜곡의 시작 사마천 사기

 

 

사마천은 사기를 쓸 때, 한漢나라 무제가 동명성왕 고두막한에게 대패한 치욕을 숨기고자 의도적으로 북부여사를 누락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그 후 중국의 모든 사서에서 북부여 역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 사서들이 이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일제 식민사학자와 국내 강단 사학자들이 다시 그것을 생각 없이 답습한 결과입니다.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의 관계 왜곡

 

 

강단사학자들은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근거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군을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의 아버지로 설정합니다.

 

'해모수와 유화부인 사이에 고주몽이 태어나 고구려를 열었다.'라고 하여, 북부여 해모수 단군과 고구려 고주몽 성제를 거의 동시대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180여 년에 걸친 북부여 6대 단군의 역사를 완전히 증발시켜 버린 것입니다.

 

 

 

 

 

 

 

 

 

 

 

 

한漢나라 무제와 북부여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과의 동북아 영토 전쟁

 

한나라 무제는 동북아의 패권을 잡으려는 욕심에 요동을 넘어 북부여까지 침공하게 됩니다.

당시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은 한漢나라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병사(病死)하고 맙니다.

 

북부여가 역사 속에서 사라질 수 있는 한韓민족 상고사 최대의 위기에서 한漢나라 무제의 군대를 물리쳐 북부여를 구한 분이 바로 동명성왕 고두막한입니다.

 

고두막한이 졸본(卒本)에서 나라를 열었다 하여 졸본부여라 하며 스스로 동명왕(東明王)이라 칭합니다.

동명성왕 고두막한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인물로 백성들에게 구국 영웅으로 추앙받아 북부여 5세 단군으로 즉위합니다.

 

 

 

북부여 4세 고우루 단군의 동생 해부루가 잠시 보위에 있었으나 동명성왕 고두막한 단군의 등장에 가섭원(동쪽 차릉)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세우게 됩니다. 고구려 시조 고주몽 성제께서 젊은 시절 잠시 몸을 의탁했던 곳이 바로 동부여(가섭원 부여)입니다.

 

 

 

 

 

 

 

 

 

 

『환단고기』가 전하는 한漢나라와 북부여의 동북아 영토 전쟁

 

 

 

한무제의 침략을 격퇴한 고두막한

 

재위 13년 계유(단기 2226, BCE 108)년에 한漢나라 유철(劉徹, 무제)이 평나(平那, 現 하북성 창려)를 침범하여 우거를 멸하더니 그곳에 4군(四郡)을 설치하려고 군대를 크게 일으켜 사방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고두막한이 구국의 의병을 일으켜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을 격파하였다. 이때 유민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전쟁을 지원하니 군세를 크게 떨쳤다.

(『환단고기』 완역본 『북부여기』 上 255쪽) 

 

 

 

 

일찍이 북부여가 쇠하면서 한나라 도적이 불길처럼 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개연히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을 세우셨다.

 

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셨다.

어떤 사람은 이분을 고열가(고조선의 마지막 47세 단군)의 후예라 말한다.

(『환단고기』 완역본 『북부여기』 下 259쪽)

 

 

 

 

 

 

 

 

 

 

 

 

동명(東明)

흔히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을 동명왕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동명東明'은 졸본에서 동명국(졸본부여)을 세우고 즉위한 고두막한의 호이다.

그래서 고두막한을 '동명왕'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김천령(金千齡, 연산군 때의 문관)은 자신이 지은 부(賦)에서 "동명이 창업하고 주몽이 계승하였다. (동명계기혁업 주몽승기여파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고 하여, 동명과 주몽이 전혀 다른 인물임을 전하였다.

 

그런데 '동명'이라는 호칭은 몽골어에서 흔히 발견되는 'Tumn'의 음역(音譯)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칭호는 '대족장·만호장'이라는 뜻으로 흉노제국의 두만선우(頭曼單于)처럼 유목 군장의 이름에서 자주 발견된다.

(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 252~256쪽)

(환단고기 북부여기 주註 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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