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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훈민정음 한글창제)

by 도생(道生) 2016. 9. 8.

근세조선의 4대 왕 세종(世宗)대왕 이도(훈민정음 한글 창제)

 

 

 

 

 

 

 

 

 

 

 

 

 

 

조선왕조 5백 년 27명의 임금 중에서 세종대왕은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대왕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충녕대군에서 왕세자가 되고 22세에 아버지 태종대왕 이방원이 선위(禪位)하여 조선의 4대 왕으로 등극했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낸 위대한 성군이라 후대에 대왕의 호칭을 붙였다고 하기도 하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조선 왕의 묘호가 모두 대왕이다.

 

 

 

조선의 3대 왕 태종대왕 이방원은 조선의 기틀을 세웠고 4대 왕 세종대왕은 조선을 발전시켰다.

온화한 성품과 일평생 지속한 학구열, 무엇보다 포용과 혁신의 지도력을 갖추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쓰는 지혜로운 인재경영의 통솔력은 아직도 현대인에게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관련 서적도 많이 출판되어 있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의 치세(治世) 속에 신생국 조선은 정치, 외교, 군사, 천문, 경제 등 국가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예악 문화가 융성해지는 등 모든 분야에서 500년을 이어나갈 조선왕조의 기틀이 다져졌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는 공적으로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지만, 인간적으로는 가장 불행한 사람이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도 뛰어난 업적 뒤에는 인간적인 고뇌가 숨어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의해 백부와 숙부가 죽었고, 외숙부가 죽었으며, 장인도 죽었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은 손자(단종)를 죽였으며, 셋째 아들(안평대군)도 죽였다.

 

자신의 형 양녕대군은 아들(세조)이 왕위 찬탈과 단종과 안평대군을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세종대왕과 문종대왕, 단종대왕을 모셨던 수많은 문무 대신이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죽어갔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재위 기간 32년을 전후한 역사는 아버지(태종 이방원)와 아들(세조 이유)에 의해 친족, 외족, 처족과 충직한 신하들이 죽어간 피로 물든 가장 불행한 가족사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는 1418년에 재위에 올라 1450년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에 있었다.

명에서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이며 ,존시를 합쳐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

묘호(廟號) 세종(世宗)이고 시호(諡號)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업적 중에 단연 으뜸으로 꼽는 것이 훈민정음(한글) 창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는 백성을 긍휼히 여긴 위민(爲民)정치이며 그 안에는 민본(民本)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훈민정음(한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홀대받고 있다.

이제는 홀대를 넘어서 한글(훈민정음) 파괴가 자행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글날이 되면 한글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한글의 위대성을 지구촌에 널리 알린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이 홀대받고 있다.

정부와 기업,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TV, 신문, 광고, 일상생활 용어에 이르기까지 외래어가 난무하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워낙 지극하여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를 위민(爲民), 애민(愛民), 민본(民本)정신의 발로(發露)라고 하지만, 정치적 목적도 다분히 있었다고 한다.

 

 

 

훈민정음(한글) 창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훈민정음(한글) 창제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세종대왕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는 훈민정음(한글)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나온다.

 

훈민정음(한글)은 창제(創製)가 아니고 모방(模倣)이다.

언문 28자는 세종대왕이 친히 지은 글이지만, 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글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옛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있듯이 옛글을 모방하였지만, 훈민정음(한글)에 발음표기, 음가 부여 등을 한 창조적인 글이다. 

 

 

 

 

훈민정음(한글) 공표(公表) - 1443년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是謂訓民正音.

시월, 상천제언문이십팔자, 기자방고전... 시위훈민정음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훈민정음(한글) 반포(頒布) -1446년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훈민정음(訓民正音) 어제(御製)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예조 판서 정인지 서문(序文)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용헌 이원 선생은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의 정신적 스승이다.

고려말에서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으로 고려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초기에 예조판서,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선의 창업자 태조대왕이 승하했을 때는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를 맡기도 하였다.

 

세종대왕 즉위년(1418) 이원을 우의정으로 제수하고 종묘에 보내서 아버지 태종대왕으로부터 전위 받았음고하게 한다.

이원은 세종 3년에 좌의정으로 승차한다.

 

 

 

용헌 이원 선생은 대사헌을 3번이나 할 정도로 조선 초기 공명정대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곧고 바르게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기 질투하는 주변의 모함으로 귀양을 간다. 공신녹권을 박탈당하고 1429년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세조 2년에 신원이 복원된다.

 

 

 

 

 

 

 

 

 

 

 

 

 

 

 

이원은 고려말 문하시중을 지낸 행촌 이암 선생의 손자다.

행촌 이암은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쓰신 분이다.

 

정종대왕과 함께 조선왕조 최고의 학구열을 가진 세종대왕에게 가장 옆에서 보필했던 이원은 『단군세기』를 당연히 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옛 글자가 『단군세기』에 나온다. 바로 가림토 문자다. 

 

 

 

 

 

 

 

 

 

 

 

 

 

 

혹자는 『환단고기』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 문자가 훈민정음(한글)을 모방한 위작이라고 한다.

훈민정음(한글) 공표와 반포는 3년의 시차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에 실려 있다.

조선 천지 백성에게 훈민정음을 알리는 공표를 할 때 분명히 옛글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였다.

 

 

 

 

혹자는 훈민정음(한글)을 바탕으로 볼 때 가림토가 훈민정음 28자를 모방하여 근대에 만들어진 위작이라고 한다.

주객이 전도된 해석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모르고 있다.

 

그 사람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옛 글자, 즉 전자(篆字)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환단고기』가 위서라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대 상으로 볼 때도 고려말에 쓰인 『환단고기』의 『단군세기』가 『조선왕조실록』보다 먼저다.

 

 

 

 

 

 

 

 

 

 

 

 

 

 

대한민국 강단사학자 중 단 한 명도 옛글을 찾기 위한 노력과 조사도 하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중화 사대주의와 일제 식민주의 사관을 답습한 주류 강단사학계의 불문율 중의 하나가 훈민정음(한글)의 모태가 되는 옛글을 절대 조사한다든가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류 강단사학자는 『조선왕조실록』에와 있는 한민족의 상고사와 고대사 관련 서적에 대해서도 절대 말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주류 강단사학자에게 『환단고기』는 절대 검증해서는 안 되는 책이며, 동양의 우주론, 인성론, 수행관, 신(神)관  융합된 세계관이 없는 그들의 얄팍한 세속 지식으로는 검증할 수도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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