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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9대 왕 성종대왕(태평성대의 군주) 이혈

by 도생(道生) 2016. 9. 13.

근세조선 9대 왕 성종(成宗) 대왕(태평성대의 군주) 이혈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 이혈은 조선의 8대 왕 예종 대왕의 친형 의경세자(덕종 추존)의 둘째 아들이다.

 

 

예종은 즉위와 함께 3살이었던 아들 이현을 원자(제안대군)로 책봉하였다. 

1469년 재위 1년 3개월 만에 예종이 승하하자 친형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잘산군 이혈)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조선의 9대 왕으로 등극한다. 성종은 예종의 사후(死後) 양자로 입적하여 13살에 조선의 왕이 되었다.

 

 

 

 

성종은 정희왕후(세조 대왕의 왕비, 대왕대비)와 한회, 신숙주, 구치관 등의 정치적 결탁으로 왕위에 오른다.

예종의 아들(제안대군, 4살)이 있었고, 성종의 형 월산대군(16살)이 있었음에도 성종에게 왕위가 돌아간 것은 종법(宗法) 질서에도 없는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이었다.

 

 

대왕대비가 결정권이 있더라도 권력의 중심에는 한명회가 있었다.

한명회는 조선의 8대 왕 예종 대왕의 장인이면서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한명회의 셋째 딸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17살 단명短命), 넷째 딸이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19살, 단명短命)다.

 

 

 

 

 

 

 

 

 

 

 

 

 

 

성종이 조선의 9대 왕으로 등극하면서 성종의 친아버지인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고, 세자빈이었던 친어머니는 왕대비(인수대비)가 된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9대 왕으로 등극한 성종은 정순왕후(세조의 왕비)와 원상(院相)들이 섭정했다. 

이때까지 국정은 신권(臣權, 훈구) 세력이 주도했다.

1476년 성종 대왕이 20세가 되면서 정순왕후의 섭정이 끝남과 함께 원상제도를 폐지했다.

 

 

 

기득권을 가진 훈구세력을 견제하면서 신진 사림 세력을 등용하였다.

- 나라에 공로가 있는 훈구세력(공신)과 지방에서 성리학(유교)을 추구하는 사림(士林, 선비) -

그러면서도 훈신과 사림을 거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등 적정한 균형을 이루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 나갔다.

 

 

 

 

세종대왕에서부터 시작된 치세는 성종대왕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그래서 성종대왕을 태평성대의 군주라고도 한다.

 

성종은 인수대비와 동신 한치인 등 외척 세력, 공신 세력, 사림 세력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왕권을 확립하여 나갔다. 

신숙주와 한명회 등 공신 세력이 죽고 쫓겨나고 나이 들어 정치 일선에서 퇴진하며 사림 세력은 켜져 갔다.

 

 

 

조선의 통치 법전 『경국대전』을 완성했고, 충효열(忠孝烈)이 담긴 『삼강행실도』를 조선의 어린아이에게 의무적으로 강습하도록 하였다. 『동국통감』, 『동문선』, 『대동여지승람』, 『삼국사절요』,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등 다양한 책을 편찬, 간행하였다.

 

북방의 여진족을 정벌함으로써 북쪽을 평안케 만들었다.

경연을 부활시키고 지방의 부패한 관리를 감시하고 적발하는 유향소를 설치하였는데 사림 세력에게는 또 하나의 정치적 발판이 되었다. 

 

 

 

 

 

 

 

 

 

 

 

 

 

 

성종대왕을 태평성대의 군주라고도 한다.

조선이 태평성대를 맞이한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정의 관료들은 복지부동하였고 백성은 윤리와 도덕이 문란해지는 모습도 보였다. 성종은 10여 명의 후궁을 거느렸으며 술과 유흥을 좋아해서 기녀와 의녀를 불러 놓고 연회를 즐겼다.

 

 

시기와 질투가 많았던 왕비(제헌왕후, 폐비 윤씨)는 세자를 만나러 온 성종에게 수라상을 엎어버렸다.

다음에 다시 왕비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말싸움 끝에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만들었다.

결국 제헌왕후(폐비 윤씨)는 폐서인 되어 쫓겨났 1482년(성종 13)에 사사되었다.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 이혈은 사림(士林)의 우두머리였던 김종직을 중용하였다.

김종직은 도승지, 병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기록했다가 발각되어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가 일어나 사림 세력은 대거 숙청된다. 사림(士林)의 영남학파 종조(宗祖) 김종직은 부관참시 되었다.

 

 

 

폐비 윤씨의 일을 향후 100년간 절대 언급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38세가 되던 1494년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이 승하하였다. 태평성대의 군주로 불린 성종대왕의 묘호는 성종(成宗)이며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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