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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10대 왕 폭군 연산군 이융

by 도생(道生) 2016. 9. 14.

근세조선 10대 왕 폭군 연산군(燕山君) 이융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 이융조선 왕조 519년 역사에서 최초로 폐위된 임금이다.

재위 기간에 상식을 넘어서는 연산군의 폭정으로 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패륜 군주의 대명사,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7)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과 제헌왕후(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자(元子) 이융의 어머니 제헌왕후는 시기와 질투로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만들어 1479년(성종 10)에 폐위되었다.

 

 

 

 

 

연산군이 4살 되던 해 제헌왕후가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나면서 정현왕후(성종의 새 왕비, 중종의 어머니)의 손에 자란다.

1483년(성종 14)에 연산군 이융은 세자로 책봉된다. 세자 이융을 바라보는 조정 대신들의 마음은 편치않았다.

세자 이융이 다음 보위를 오를 것이 명백하므로 보복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헌왕후(폐비 윤씨)를 폐위하고 사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수대비는 세자 이융보다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연산군의 이복동생 중종)을 더 아꼈다. 차별로 상처를 받고 고독하고 우울하게 자란 세자 이융의 인성이 올바를 수 없었다.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고 순탄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세자 이융의 이런 내 고통은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성격의 폭군 연산군으로 점차 변화해 가게 된다. 

 

 

 

 

 

 

 

 

 

 

 

 

 

 

 

 

1494년 조선의 9대 왕 성종이 승하한다.

성종은 향후 100년간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1494년 조선의 9대 왕 성종 대왕이 승하하자 연산군은 조선의 10대 왕으로 등극한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 1년(1495)에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폐비 윤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사사된 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방을 정비하고 퇴폐와 부정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암행어사 파견, 인재 등용을 위해 별시문과 실시, 『국조보감』, 『여지승람』 등을 수정하여 출간하는 등 연산군은 즉위 초에 사림 세력과 함께 국정을 쇄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신하들을 배척하며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하였고, 점차 폭정으로 가며 폭군의 모습을 드러낸다.  

 

 

 

 

1498년(연산군 4)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기록하면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조선왕조 519년 역사에서 사화(士禍)는 무오(戊午), 갑자(甲子), 기묘(己卯), 을사(乙巳)사화 네 번이 일어났다.

사화가 일어난 해의 간지(干支, 천간지지, 60갑자)를 합쳐 '00 사화'라 한다.

사화(士禍)란 사림(선비 세력)의 화(禍)를 말한 것으로, 사림(士林, 선비) 세력이 화(禍)를 당한 것을 말이다.

 

 

 

 

 

사림 세력이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한 것은 선대왕 성종 때였다.

김종직을 시작으로 출사한 사림 세력은 훈구(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성종의 정치적 의도도 깔렸었다.

 

김종직이 <조의제문>에서 세조를 비난했다고 하나 이는 증손자인 연산군의 왕권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훈구(공신, 훈신)세력의 이극돈과 유자광 등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림 세력을 몰아세웠다.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로 반목과 대립의 관계를 지속하던 훈신세력(공신, 훈구파)과 사림 세력의 균형은 깨지고 사림세력은 죽거나 유배 가는 등 초토화된다. 

 

 

훈구세력도 온전하지 못했다.

불경한 사초 기록을 보고 즉시 보고하지 않은 죄를 물어 대부분 좌천됐다.

 

 

 

 

 

 

 

 

 

 

 

 

 

 

조선의 법궁(法宮, 정궁) 경복궁에는 경회루가 있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소로 만들어졌으며, 때론 임금과 신하가 연회를 즐기고, 기우제와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폭군 연산군에게 경복궁 경회루는 탐욕과 향락을 즐기는 놀이터였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연산군에게 직언하는 신하는 남아 있지 않았고, 나라의 곳간은 비어갔다.

급기야 공신들의 공신전(공신들에게 주었던 토지)마저 몰수한다.

 

 

 

 

사림 세력은 사라졌고, 외척 세력과 부중(府中)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희대의 간신 임사홍은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을 꼬드겨서 폐비 윤씨의 일을 연산군에게 말하며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그나마 남아 있던 사림 세력은 몰살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훈신세력(훈구파), 부중세력(부중파) 역시 이 참화를 비켜가지 못했다.

 

 

연산군은 어머니 제헌왕후(폐비 윤씨)가 폐위되는 과정,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반대 등 폐비 윤씨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유배 보낸다.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폭행에 가까울 정도로 밀어 버려 그 후유증으로 승하한다.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귀인 정씨의 아들이 직접 때려죽이게 하였고 두 아들 역시 귀양보냈다가 죽였 

 

 

 

 

연산군의 폭정은 형벌을 내릴 때도 그대로 나타났다.

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지는 낙신(烙),

온몸을 토막 내어 죽이는 촌참(寸斬),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내걸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인 후에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는 쇄골표풍(碎骨飄風)과 손바닥을 뚫고, 가슴을 빠개는 형벌이 너무나도 참혹했다.

 

 

조선의 10대 왕 연산군은 1506년(연산군 12) 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악녀와 요녀로 불린 장녹수와 후궁, 연산군의 아들, 신수근과 임사홍 등 연산군 주위에 있던 핵심 인사들은 모두 죽었다.

 

 

 

연산군이 왕세자로 있을 때 세자빈으로 들어온 왕비(폐비 신씨, 연산군 11년의 존호 제인덕왕비)는 폐위되었다.

폐비 신씨의 본관이 거창이라 거창군부인이라 한다.

 

연산군은 1506년 유배지 강화 교동도에서 병사했다.

폐위된 왕이라 묘호는 없고 무덤도 능(陵)이 아니라 묘(墓), 실록 역시 연산군일기로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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