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조선 16대 왕 인조 대왕(삼전도의 굴욕) 이종

by 도생(道生) 2016. 9. 20.

근세조선 16대 왕 인조(仁祖) 대왕(삼전도의 굴욕) 이종

 

 

 

 

 

 

 

 

 

 

 

 

 

인조반정으로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이 폐위된다.

서인이 주축이 된 반정 세력과 손을 잡은 선조대왕의 손자(서자의 아들) 능양군 이종이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으로 등극한다.

 

 

능양군 이종은 조선의 14대 왕 선조대왕과 후궁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5남)의 큰아들이다.

정원군의 형 신성군(4남)이 15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셋째 아들 능창군을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광해군 재위 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북파가 능창군을  '신경희의 옥사' 사건과 연관지어 유배를 보냈다가 죽였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 이종은 광해군 때 죽은 능창군의 친형이다.

그래서 인조반정에 직접 참여한 능양군(인조대왕)은 광해군과 대북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컸다.

 

 

 

 

 

 

 

 

 

 

 

 

능양군 이종은 서인 반정 세력과 손을 잡고 조선의 16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반정(反正)은 본래의 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서인의 반정(反正) 명분은 '폐모살제(廢母薩弟)와 존명사대(尊明事大)를 저버렸다는 것이었다.

폐모살제는 광해군과 권력의 중심에 있던 대북파(동인)가 서인이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려고 했다고 해서 벌어진 사건이다.

 

왕권이 위협받고 사림 세력 간 뿌리 깊은 대립과 반목의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폐모살제의 죄는 도덕적으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 일이다.

 

 

 

 

 

 

 

 

 

 

 

 

 

반정 세력의 존명사대(尊明事大) 명분이 결국 나라를 망쳤다는 것이 후대 학자들의 평가다.

삼전도의 굴욕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광해군의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외교정책으로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하였다고 평가받지만, 인조와 서인 반정 세력은 숭명배금(崇明排金, 명나라를 숭배하고 오랑캐 야만족 금나라를 배척한다.) 정책으로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논공행상하는 과정에서 공신록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란 자가 있었다.

서인은 이괄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여 궁지에 몰아넣자 이괄은 진짜 역모를 한다. 

 

1624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로 도망갔다. 이괄은 선조대왕의 10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괄의 난은 불과 3일 만에 장만 장군에 의해 끝났고 토벌되는 과정에서 흥안군은 죽었다.

 

 

 

 

 

 

 

 

 

 

 

 

 

 

1627년(인조 5) 후금(여진족, 청나라)은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황해도까지 쳐들어온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대왕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갔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보냈다.

형제관계를 맺는 강화조약인 정묘조약을 체결하고 후금은 철수한다.

 

 

 

1636년(인조 14) 후금(여진족)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다. 

 

압록강을 넘은 지 불과 6일 만에 한양에 들어왔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40여 일간 20만 대군으로 압박하였고 결국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했다.

 

 

남한산성에 갇힌 임금을 구하기 위해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등지에서 출병한 수 만 명의 군사(근왕군)들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전멸당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군신(君臣)의 예를 올린다.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땅바닥에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항복의식을 행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 사건이다.

 

 

 

당시 국제정세는 명나라는 기울어가는 달이었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인조와 반정 세력의 지나친 명나라 사대주의 정책의 결과는 왕이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50만 명에 이르는 조선의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고 수만 명의 군사가 희생됐다. 

 

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도 함께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청나라에 굴복을 반대했던 척화론자들도 끌려갔다.

 

 

 

 

 

 

인조반정은 폐모살제와 존명사대를 저버렸다는 명분으로 왕을 바꿨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치 보복 성격이 더 강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반정 세력은 살육정치로 대북파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일부는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서인의 시대착오적인 숭명배금(崇明排金) 정책은 인조에게는 전도의 굴욕을 조선 백성에게 궁핍한 삶과 이산의 아픔을 안겨줬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 이종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소현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세손의 죽음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 이종은 한양을 두 번이나 버리고 도망갔던 임금이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소현세자가 9년 만인 1645년 청나라에서 돌아와 아버지 인조와 조정 대신들에게 핍박을 당한다. 그리고 귀국한 지 불과 3개월도 안 돼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1646년 소현세자의 세자빈은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아들 3명은 제주도로 귀양가 둘은 죽고 막내 경안군만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22살에 세상을 떠났다.   

 

 

 

 

1649년(인조 27)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 이종은 삼전도의 굴욕을 가슴에 안고 승하한다.

묘호는 인종(인종)이며 시호는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