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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17대 왕 효종대왕(북벌론) 이호

by 도생(道生) 2016. 9. 21.

근세조선 17대 왕 효종(孝宗)대왕(북벌론) 이호

 

 

 

 

 

 

 

 

 

 

 

 

 

 

 

 

조선의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1619~1659)는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 이종(1595~1649)의 둘째 아들로 1649년(인조 27) 인조대왕이 승하하면서 조선의 17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인종대왕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 조선에 돌아온 지 3개월도 안 돼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평민과 같은 장례로 신속하게 치러진다.

 

 

 

소현세자는 친청(親淸)주의자였던 반면, 봉림대군(효종) 이호는 아버지 인조와 같은 대명(大明) 사대주의와 반청(反淸)주의자였다.

 

 

 

조선의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는 1645년(인조 23) 친형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자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다.

종법(宗法) 질서로 보면 당연히 소현세자의 큰아들 경선군 이백이 세자(세손)에 책봉되어야 하지만, 인조는 왕세손의 자리에 소현세자의 큰아들에게 주지 않고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의 세자빈 민씨와 경선군 이백, 경완군 이석린, 경안군 이회는 유배되어 사사되고 막내아들만 겨우 살아남지만, 22세의 젊은 나이에 단명한다.

 

 

 

 

 

 

 

 

 

 

 

 

 

 

효종대왕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공신세력 우암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뿐만 아니라 미수 허목과 윤선도 등 남인도 등용하여 국정을 운영한다.

 

조선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는 재위 11년 동안 대동법 시행, 농가집성 간행,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 신부의 시헌력(時憲曆) 사용 등 다양한 정책을 써가며 민생 안정에도 힘썼지만, 중점적으로 군비강화와 왕권강화에 힘썼다.

 

 

 

 

조선의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는 1654년과 1658년에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이 아닌 나선(러시아)정벌에 선다.

나선(러시아)정벌은 러시아의 잦은 노략질 때문에 청나라가 요청한 것으로 조총과 화약으로 무장한 정예군 100여 명을 파병한 것이지 효종의 청나라 북벌론과는 무관하다. 

 

 

 

 

친청(親淸) 파였지만 소현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세손들의 죽음에 깊게 관여한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을 반대하다가 친명(親明)파 송시열 등에게 밀려나 유배된다. 유배지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밀서를 보냈다.

 

청나라가 사신과 군대를 보내자 효종과 조정 대신은 역심을 품은 김자점의 모략이라고 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김자점은 다시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 모의하여 역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1651년(효종 1년) 죽는다.  

 

 

 

 

 

 

 

 

 

 

 

 

 

 

 

조선의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는 우암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의 대명사가 되었다.

효종과 송시열 모두 철저한 친명반청(親明反淸)주의였다.

그들이 주장한 북벌론은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복수와 소중화 주의에 따른 명나라에 대한 복수다.

 

 

 

조선에서 북벌론을 주장한 것은 효종과 대명(大明)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조선의 일반백성들은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원했지 전쟁을 원한 백성은 없었다.

 

가식으로 주장했든 실제로 주장했든 북벌론을 주장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목적(복수)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조선의 백성을 충성과 대의로 포장하여 죽음의 위기로 내몰려고 한 것이다.

 

 

 

 

 

조선의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는 조총과 화포로 무장한 어영청을 확충하고, 임금의 경호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고 도성 남부를 경호하는 수어청을 강화하였다. 병사로 동원된 백성은 생업을 중단해야 했고 군사력확충과 왕권강화에 필요한 세금을 내야 했다.

 

 

더욱이 효종이 주장한 북벌론, 즉 청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군비확충에 필요한 자금 이상의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다.

진짜 북벌이 실행된다면 안정을 찾은듯한 조선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효종의 북벌론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신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중앙군 확충에 일반백성뿐만 아니라 많은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권세력(기득권층)이 가장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볼 때 청나라(후금)는랑캐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나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는 대명(大明)제국을 쓰러트린 신흥강대국이었다.

 

 

 

명나라(1368~1644)에서 청나라(1616~1911)로 바뀌 왕조 교체기였다.

조선이 조총과 화약으로 무장한 정예군을 있었다고는 하나 군사력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에 조선이 청제국(淸帝國)을 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효종과 서인(노론)의 영수 송시열 등도 모두 알았다.

 

그래서 효종은 승하하기 3개월 전 송시열과 독대하며 북벌론을 거론할 때 조총과 화포로 무장한 정예군을 양성하여 10년 후쯤이란 단서를 달아 북벌론을 말했다.

 

효종은 과연 신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대군을 어떻게 모집할 것이며, 정예병으로 만들 무기와 훈련자금,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 수용비용 등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세부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효종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했다는 우암 송시열 역시 표면적으로는 찬성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은 사적으로는 효종대왕을 가장 잘 아는 스승이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학자이며, 노련한 정치가로서 노론의 영수였다.

 

그런 송시열이 효종의 북벌론 주장에 앞장서서 실천하지 않은 것은 현실적으로 북벌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서인 세력은 지속적으로 권력유지가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청과 북벌을 외치는 임금이 필요했지 실제 북벌을 감행할 임금은 필요하지 않았다.

 

효종과 송시열(집권 정당)의 동상이몽 북벌론 때문에 일부에서는 북벌론을 진짜 시행할 것 같았던 효종대왕의 독살설이 조심스럽게 제기하기도 한다.

 

 

 

 

 

 

 

 

 

 

 

 

 

 

후대의 학자들 사이에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진짜 북벌을 준비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효종의 북벌론은 삼전도의 굴욕과 같은 치욕을 다시는 당하지 않기 위한 군비확충과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송시열 역시 북벌론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다는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17대 왕 효종대왕 이호는 1659년(효종 10)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침을 잘못 맞고 41살의 나이에 급사했다.

묘호는 효종(孝宗)이며, 시호는 효종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孝宗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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