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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23대 왕 순조 대왕(세도정치) 이공

by 도생(道生) 2016. 9. 27.

근세조선 23대 왕 순조(純祖) 대왕 이공 - 세도정치(勢道政治)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1752~1800)이 승하하자 조선 23대 왕 순조 대왕 이공(1790~1834)이 조선의 23대 왕으로 등극한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 이산과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문효세자 이순(1782~1786)이 5살에 요절하자, 정조대왕과 수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왕세자 이공이 정조대왕의 정비 효의왕후 양자로 입적하여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조선의 23대 왕 순조 대왕 이공은 부왕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11살에 보위에 올랐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21대 왕 영조의 계비)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정조대왕에 의해 유배 갔다가 죽었다. 정조와 정순왕후 두 사람은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고, 정조가 왕권강화와 개혁정치, 문예 중흥을 위해 만든 모든 제도와 질서는 권력과 복수에 눈먼 정순왕후에 의해 무너진다.

 

 

피와 살을 받지는 않았지만, 정순왕후는 순조에게 증조할머니뻘이 된다.

권력에 눈이 먼 대왕대비 정순왕후(21대 왕 영조의 계비)와 조선의 23대 왕 순조대왕 이공의 장인인 외척 세력 김조순은 권력을 독점한다.

 

 

 

 

 

 

 

 

 

 

 

 

정순왕후와 경주 김씨 외척세력, 그리고 노론 벽파 세력은 정조대왕이 등용한 남인과 소론 시파를 숙청했다.

정순왕후가 약 4년간의 수렴청정을 그만두자 이번에는 순조대왕의 왕비 순원왕후의 외척 안동 김씨가 주도권을 잡았다.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파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며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조선의 23대 왕 순조 대왕 이공을 보필해 줄 충신은 사라졌다.

탕평책이 사라지면서 서로 견제하는 붕당정치는 와해하였다.

 

정조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도 사라졌고,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도 축소되었다

상당수 남인이 신앙했던 천주학(천주교)도 박해를 받았다. 이른바 신유박해(1801년) 사건이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고, 순원왕후의 아버지 김순조는 안동 김씨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그 뒤를 이은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김순조로부터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온갖 전횡을 일삼으며 조선을 병들게 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순조가 친정을 하면서 아버지 정조대왕의 정책을 주도하려 했으나, 임금을 허수아비로 아는 안동 김씨 외척 세력 김조순과 아들 김좌근이 전횡을 일삼으며 조선을 몰락의 길로 몰고 간 60년 안동 김씨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1819년(순조 )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풍양 조씨가문의 딸을 간택했다.

 

조선의 23대 왕 순조 대왕 이공은 큰아들 효명세자(1809~1830,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문조익황제로 추존)를 순조 19년(1819) 왕세자로 책봉했다.순조는 외척 세력 김조순의 세도정치를 막기 위해서 1827년(순조 27)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김조순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견제하며 학문과 예술 분야 등에 뛰어난 재능으로 궁중 무용을 집대성했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하던 약 4년간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잠시 주춤한듯했으나, 1830년(순조 30)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22살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활개를 친다.

 

 

 

 

 

 

 

 

 

 

 

 

부정부패, 매관매직, 수탈과 권력남용은 조세제도, 과거제도, 인사제도 등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렸다. 

 

조선의 국정은 세도정치가의 손에 좌지우지됐다.

전정(田政)과 군정(軍政)과 환정(還政)의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이 그것이다.

 

 

 

 

1811년(순조 ) 조선 팔도에 대흉년이 들었다.

홍경래가 있던 평안도는 그 피해가 극심했다.

 

세도정치의 폐해에 자연재해까지 더해져 백성의 삶은 더 궁핍해지며 벼랑 끝으로 몰렸다.

조선의 관료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의 삶은 갈수록 궁핍해졌다.

 

 

힘없는 백성에 대한 부역과 수탈 등 지옥보다 더한 삶 속에 도탄에 빠진 백성의 원성은 하늘까지 치솟았고 결국 활화산이 되었다.

홍경래의 난에 참여한 대다수는 조선의 하층민농민 등이었다. 조선의 진정한 변혁을 바란 백성의 외침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권력에 대한 탐욕과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전복을 꿈꾼 역적도 섞여 있었다.

 

 

홍경래의 난은 나라를 손바닥에 놓고 전횡을 일삼은 정순왕후와 경주 김씨 외척 세력, 순원왕후 아버지 김조순과 안동 김씨 외척 세력과 노론 벽파와 시파 세력의 세도정치가 낳은 결과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속에 34년의 재위 대부분을 보낸 조선의 23대 왕 순조 대왕 이공은 아버지 정조대왕의 유업을 잇지 못하고 1834년(순조 34) 45살의 나이로 승하한다.

 

묘호는 순조(純祖)이며,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로 추존되어 시호는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이다.

 

 

 

 

조선왕조의 세도(世道)정치는 조선의 11대 왕 중종대왕 때 정암 조광조에서 비롯되었다.

유학(儒)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한 세도(世道)정치는 왕도(王道)의 이상을 구현하는, 즉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정치이념이다.

 

 

정조 때 임금의 신임을 얻은 홍국영을 세도(勢道)정치의 시작으로 본다.

홍국영과 같이 군주를 보좌하여 왕도정치(세도世道)를 이루어야 하는 신하가 권력을 전횡하거나, 특정 권력세력이 임금과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국정을 농단하는 정치를 세도(勢道)정치라 한다.    

 

홍국영과 같이 임금의 신임을 받은 특정인, 안동 김씨와 같은 왕실의 외척 등 특정 세력이 자신과 패거리가 가진 권력을 전횡하면서 세도(世道)정치는 세도(勢道)정치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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