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조선 26대 왕 고종(흥선대원군의 아들) 이희

by 도생(道生) 2016. 9. 30.

근세조선 26대 왕 고종 이희 - 흥선대원군의 아들

 

 

 

 

 

 

 

 

 

 

 

 

 

 

 

 

19세기 말 조선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날로 심해졌고, 밀려오는 제국주의 열강 앞에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의 25대 왕 철종대왕 이변이 33살(1831~1864)의 나이에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선의 16대 왕 인조대왕의 후손이며 흥선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이명복, 1852~1919)이 1863년 조선의 26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조선 궁궐에는 효명세자의 비 신정왕후(풍양 조씨)와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남양 홍씨), 철종의 비 철인왕후(안동 김씨)가 있었고,

조정에는 왕실의 외척 풍양 조씨, 남양 홍씨, 안동 김씨가 서로 대립하며 세도정치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23대 왕 순조의 정비이며, 24대 왕 헌종의 할머니였던 순원왕후(안동 김씨)가 1857년(철종 8)에 승하하였다.

순원왕후 승하 후에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극에 달했다.

 

조선의 26대 왕 고종 이희가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배경은왕후(안동 김씨)가 승하하면서 왕실의 가장 큰 어른 신정왕후(풍양 조씨, 조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의 눈을 피해 조대비(신정왕후)와 흥선군 이하응은 밀약하였다.

 

 

조대비로 많이 불리는 신정왕후(풍양 조씨)는 효명세자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다.

신정왕후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이명복)이 익종대왕(효명세자)의 대통을 이어받도록 했다.

이재황(이명복, 고종)은 익종(추존황제)의 정비였던 조대비(신정왕후)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이 되었다.

 

 

 

1863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조선의 26대 왕으로 등극한 고종 이희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섭정한다.

 

 

 

고종이 왕으로 즉위했지만, 권력은 조대비(신정왕후), 풍양 조씨,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쥐고 있었다.

이미 조선은 60년 동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국가의 기강이 무너졌다.

조선의 국가기관은 제 기능을 못하고 기능 자체가 마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흥선대원군은 도탄에 빠진 백성의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정치, 경제, 사회 등 조선을 개혁해 나갔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았을 때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에게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어린 아들 고종을 대신한 섭정이었지만, 권력이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

세도정치를 하였던 안동 김씨들의 자리를 빼앗고, 세도정치 속에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을 수탈하였던 탐관오리를 처벌하였다.

 

편중됐던 인재를 능력과 따라 고루 등용하였으며, 조세제도를 개편하여 양반도 군포세와 호포세 등 일정세금을 부과하였다.

서원을 철폐하였으며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이미 썩을 대로 썩버린 조선의 국가기능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이었다.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의 법궁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백성의 원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서원 철폐로 유생들은 흥선대원군에게서 등을 돌린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조선의 문을 두드리며 통상 수교를 요구하였다.

 

천주교 신부 9명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

미국 제너럴 셔먼호 방화 보복으로 1871년(고종 8) 미국 군함이 침략한 신미양요.

 

 

 

예나 지금이나 준비되지 않은 개방은 국가 부도가 정답이다.

 

흥선대원군은 병들대로 병든 조선을 치유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국가기능을 상실한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울려고 한 개혁에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1873년(고종 10) 조선의 26대 왕 고종 이희가 친정을 시작한다.

 

고종의 왕비 중전 민씨와 최익현이 모의하여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탄핵한다.

결국, 중전 민씨와 최익현의 공동의 적이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실각한다.

 

 

흥선대원군의 며느리와 고종의 신하가 흥선대원군과 아들 고종의 천륜을 끊어버렸다. 

 

흥선대원군을 몰아낸 다음 왕실의 외척 민씨 일파가 권력을 잡는다.

중전 민씨와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망국의 길로 빠르게 나아간다.

 

 

 

 

 

 

 

 

 

 

 

 

 

1876년(고종 13) 근대 불평등 조약의 시작인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복귀한 듯했으나 중전 민씨의 부탁을 받은 청나라 군대가 흥선대원군을 납치한다.

 

 

 

 

1884년(고종 21)에 청나라와 손을 잡은 민씨 일파와 일본을 등에 업은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변란을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1894년(고종 31) 근대역사의 출발점 동학 농민혁명이 일어난다.

 

일본의 총칼 아래 30만 명의 조선 백성이 죽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되기 전까지 일본 제국주의는 약 800만 명의 조선 백성을 죽였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자 고종의 왕비 중전 민씨는 러시아와 손을 잡는다.

1895년(고종 32) 일본은 러시아와 손을 잡은 중전 민씨를 무참하게 시해한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급기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게 된다.(아관파천)

 

 

병든 조선을 개혁하고자 한 흥선대원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권력을 잡은 중전 민씨와 민씨 일파의 급격한 개방으로 조선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