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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철의 여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청주한씨

by 도생(道生) 2016. 10. 8.

세조의 며느리, 의경세자(덕종 추존)의 부인, 예종의 형수, 성종의 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

조선왕조 철의 여인 인수대비(소혜왕후) 청주 한씨

 

 

 

 

 

 

 

 

 

 

 

 

 

 

 

전주 이씨가 창업한 조선왕조에서 추존 왕비를 포함하여 가장 많은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 청주 한씨 가문이다.

 

 

 

조선왕조의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인수대비(1438~1457)는 본래 왕비가 아니다.

 

세조가 조선의 7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큰아들 이장은 의경세자(1437~1457)가 되었고 청주 한씨는 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면서 궁궐 밖으로 나간다.

 

 

이후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조선의 9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궁궐로 다시 돌아왔다.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를 의경왕(덕종)으로 추존하고 한씨는 인수왕비가 되었다.

 

 

 

 

 

 

 

(청주 한씨 시조 한란의 묘)

 

 

 

 

 

 

청주 한씨 집안은 인수대비를 비롯한 조선왕조 왕비 6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을 창업한 1대 왕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청주(안변) 한씨는 조선이 개국하기 한 해 전 1391년 사망하였다.

태조 이성계 승하 후 신의왕후로 추존된 왕비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로 추존하였다.

 

 

 

조선의 7대 왕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 추존)의 부인 인수대비 청주 한씨(한확의 딸)

조선의 8대 왕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청주 한씨(한명회셋째 딸), 계비 안순왕후 청주 한씨(한백륜의 딸)

 

조선의 9대 왕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청주 한씨(한명회의 넷째 딸)

조선의 16대 왕 인조의 정비 인렬왕후 청주 한씨(한준겸의 딸) 등 추존 왕비를 포함하여 총 6명이다.

 

 

 

 

 

 

 

 

 

 

 

 

 

 

청주 한씨의시조는 고조선의 번조선 74대 왕 기준이다.

고조선은 삼한관경제, 즉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한나라 여태후(한고조 황후)가 한나라 창업공신을 숙청하자 연나라 왕으로 있던 노관은 흉노로 도망가고 노관의 밑에 있던 위만도 연나라와 인접한 번조선으로 몸을 피한다.

 

 

 

고조선 백성으로 위장하여 번조선에 들어온 위만을 번조선의왕은 상하 운장을 수비하는 장수로 임명하였고, 그곳에서 1년 동안 몰래 세력을 키운 위만은 준왕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다. 이른바 위만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위만에게 쫓겨난 번조선의 왕 기준은 고조선 유민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건너온다.

처음 정착한 곳이 금강 하구다. 아직도 그곳에는 어래산(御來山), 즉 임금이 오신 산이라는 지명이 있다.

 

청주 한씨 시조로 모시고 있는 한란은 번조선 기준 왕의 먼 후손으로 청주 한씨의 원시조는 기준이다.

 

 

 

 

 

 

 

 

 

 

 

 

 

 

철의 여인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의 아버지는 한확(1400~1456)이다.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한확(서원 부원군)은 세조를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 공신이며 대학자이고 외교가였다.

한확의 누님(강혜장숙여비)은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의 후궁이었고, 여동생(공신여비)은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의 후궁이었다.

 

 

 

 

대학자 한확의 딸로 태어난 한씨(인수대비 소혜왕후)는 유학(유교) 서적을 읽으며 자랐다.

유학의 경서를 다 읽는 등 공부에 대한 열의가 지나쳐 윗사람과 주위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엄격하고 완벽함을 추구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지아비에게 내조를 다하였으며 자식에게는 차갑고 엄정하게 대하여 완벽을 추구했던 인수대비를 철의 여인이라고 한다.

 

 

 

 

유도(儒道, 유교)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이 있다.

천원지방은 하늘과 땅의 덕성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도 천지 만물을 낳아 준 천지 부모, 즉 하늘과 땅의 덕성을 본받아 실천하며 살아왔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네모지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하늘(아버지)은 원만하고 땅(어머니)은 방정하다'가 천원지방의 본래 의미다.

 

'말이나 행동이 나무랄 데 없이 다르다'는 방정함이 땅(어머니)의 덕성이다.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으로서 인수대비가 반듯하고 방정한 땅의 정신을 본받아 반듯하고 방정한 어머니로 사는 삶을 지향하고자 했던 모습이 보인다.

 

 

 

 

 

 

 

 

 

 

 

 

 

인수대비(소혜왕후)는 조선왕조 왕비 중 가장 학식이 많은 왕비로 알려졌다.

 

 

 

궁중의 비빈과 일반 부녀자를 올바르게 제도하기 위해 성리학 여성 수신교양서이며 윤리서인 『내훈(內訓)』을 저술하였다.

성리학(유교)적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던 인수대비(소혜왕후)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

 

뛰어난 지식의 소유자 인수대비는 산스크리스트어(범어), 한문, 국문 등으로 불교에 관한 책도 저술했다.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인쇄하고 『금강경』을 직접 필사하기도 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 승려의 신분을 국가가 인정해 주는 도첩제 폐지에 반대한 인수대비는 이 문제로 조정 신료들과 몇 차례 마찰을 빚기도 한다.

 

 

 

 

 

 

 

 

 

 

 

 

 

 

 

 

『내훈』은 『소학』, 『명심보감』, 『열녀전』, 『여교』 등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내훈』은 한 인간으로, 한 여성으로, 한 아내로, 한 어머니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책으로 쓴 것이다.

 

 

『소학』은 이 세상에 현존하는 책 중 인성교육에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다.

그런 면에서 시대를 앞서 간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며 철의 여인 인수대비 청주 한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훈』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성인(聖人)의 학문을 보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갑자기 귀하게 되면 이는 원숭이에게 의관을 갖추어준 것과 같다.'라는 『내훈』은 언행과 효도, 예의, 남편과 아내, 어머니로서 행실을 비롯하여 검소함과 청렴함, 가정과 친척의 화목 등에 관련된 내용으로 총 7장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혹자는 『내훈』이 성리학적 유교 사회 조선의 남성중심 사회를 더욱 공공이 하여 여성을 가부장적 질서에 옭아매는 책이라고도 한다. 인수대비가 저술한 『내훈』이 조선 후기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천 년 이래 동서양은 정치와 종교,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남존여비 한 남성중심의 사회였다.

단지 국가가 법과 제도로 규제하고 강령과 사회 풍습 등이 표면적이었느냐 내면적이었느냐는 다소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인수대비(소혜왕후)는 세상의 이치를 밝혀주고 인간 삶을 가장 올바르게 가르치는 성리학적(유학)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불도(불교)를 신앙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인수대비가 두 가지 종교를 모두 신앙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종교적 개념은 근현대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것이고, 당시로써는 현재의 편향적인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삶의 문화 그 자체였다. 

 

 

 

 

 

 

 

 

 

 

 

 

 

 

 

인수대비는 1457년 의경세자가 20살에 요절하면서 21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조선의 8대 왕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인 1469년 20살에 승하한다.

 

 

조선의 7대 왕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는 정치적 선택을 하여 의경세자의 작은아들 자을산군(잘산군)을 왕으로 선택한다. 

정희왕후의 정치적 선택 뒤에는 사돈인 한명회(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아버지)와 인수대비 한씨가 있었다.

 

 

 

 

예종의 아들 원자(제안대군 이현, 1466~1525)는 너무 어렸고, 다음 왕위 계승 서열인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은 병약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13살의 자을산군(잘산군)은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1469년에 조선의 9대 왕 성종으로 즉위했고 정희왕후가 20살 때까지 섭정했다. 인수대비 청주 한씨는 세자빈에서 청상과부로 12년이 지나 왕의 어머니가 되어 궁으로 들어왔다.

 

 

 

 

 

 

 

 

 

 

 

 

 

 

요절한 의경세자의 세자빈이었던 청주 한씨(인수대비)는 왕의 어머니이지만 법적으로는 성종의 신하였다.

이 문제가 조정에서 공론화되어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었다.

 

 

당시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1418~1483, 자성대왕대비)와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1445~1499, 인혜왕대비)가 있었다.

세자빈 출신 청주 한씨 인수왕비는 왕비 서열 3위였으나 왕의 어머니로 왕비 서열 2위로 오른다.

 

 

 

1474년(성종 5) 성종이 아버지 의경세자를 의경왕(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인수왕비는 인수왕대비가 된다.

1494년(성종 25) 조선의 9대 왕 성종이 승하하고 인수대비는 인수대왕대비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최고의 태평성대를 열었다는 성종은 인수대비의 아들이다.

그러나 인수대비(소혜황후) 청주 한씨의 말년은 비참했다.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청주 한씨가 승하하자 숙의 윤씨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숙의 윤씨가 조선의 국모 중전의 자리에서 폐위될 때 인수대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폐비 윤씨의 아들 폭군 연산군이 조선의 10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하려는 연산군과 인수대비가 대립하던 중 1504년(연산군 10) 68세로 승하한다.

 

 

 

연산군일기는 중종반정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쓴 책이다.

중종이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이기도 했지만, 재위 내내 권력을 잡은 반정공신에게 휘둘리며 살았다.

반정공신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일으킨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폭군 연산군의 폭정을 과장해서 기록했을 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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