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내조의 여왕 세종대왕 부인(왕비) 소헌왕후 청송심씨

by 도생(道生) 2016. 10. 11.

조선왕조 최고 내조의 여왕, 세종대왕 부인(왕비) 소헌왕후 청송 심씨

 

 

 

 

 

 

 

 

 

 

 

 

 

 

 

조선왕조 최고의 임금이라 칭송받는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 이도(1397~1450)는 단순히 왕(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지도력만 갖추고 성군이 된 것이 아니다.

 

 

왕권의 기틀을 다져준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문무 대신, 그리고 조선왕조 왕비 중에서 가장 훌륭한 내조자, 내조의 여왕 부인(왕비)소헌왕후 청송 심씨(1395~1446)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청송 심씨 집안은 조선왕조에서 3명의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다.

 

조선 4대 왕 세종대왕 이도의 왕비 소헌왕후 청송 심씨(심온의 딸),

조선 13대 왕 명종대왕 이환의 왕비 인순왕후 청송 심씨(심온의 6대손),

조선 20대 왕 경종대왕 이윤의 왕비 단의왕후 청송 심씨(심온의 12대손)다.

 

 

 

 

조선 최고의 내조의 여왕, 세종대왕의 부인(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문하시중(영의정)을 지낸 심용이다.

 

할아버지 심덕부, 아버지 심온, 남동생 심회는 모두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명문집안이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부마(경선공주의 남편)가 큰 숙부(작은아버지) 심종이다.

 

 

 

 

 

 

 

 

 

 

 

 

 

 

소헌왕후 심씨는 1408년(태종 8) 조선의 3대 왕 태종 이방원(1367~1422)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 이도와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로 책봉된. 1418년(태종 18) 왕세자(양녕대군)가 폐세자되면서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어 청송 송씨는 세자빈(경빈)이 된다.

 

 

1418년(세종 즉위년)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이 선위하면서 왕세자 이도가 조선의 4대 왕(세종대왕)으로 즉위한다.

세자빈 청송 심씨는 조선의 4대 왕비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8월 14일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14일 중궁(中宮, 소헌왕후)의 호를 검비(儉妃)에서 공비(恭妃)로 고쳤다.

 

 

 

 

 

 

 

 

 

 

 

 

 

 

신생 국가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태종 이방원은 외척을 제거해 나간다.

 

먼저 태종의 부인(왕비) 여흥 민씨 일족(민무구 4형제)을 처단하고, 다음으로 세종의 처족 청송 심씨 일족을 제거한다.

심온의 아들과 민무휼의 딸이 혼인하여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자 태종은 심온을 영의정으로 제수한다.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떠날 때 심온 일행의 기세가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심온의 막냇동생 심정이 태종에 대한 불평을 문제 삼아 역모로 몰아 심온과 심정이 죽었다.

 

 

 

 

 

 

 

 

 

 

 

 

 

 

소헌왕후 심씨의 가족은 천인(賤人)으로 됐다가 얼마후 국모(國母)의 집안은 천인이 될 수 없다는 태종의 하교에 양민(良民)이 되었다. 조선의 창업공신이며 고려 때부터 명문집안이었던 청송 심씨 소헌왕후의 친정은 멸문지화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몰락하였다.

 

1426년(세종 8) 소헌왕후 심씨의 친정어머니와 자녀들이 천안(賤案, 관노비)에서 벗어나 복원된다.

집으로 돌아온 처가식구와 왕비를 위해 세종은 소헌왕후로 하여금 친정어머니 안씨 집에 행차하여 연회를 베풀게 한다.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과 작은 숙부 심정이 역모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폐비론이 불거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28일

 "그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후비(后妃)가 된 일은 옛날에도 또한 있었으며, 하물며 형률(刑律)에도 연좌한다는 명문(明文)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恭妃)에게 밥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니, 경(卿) 등은 마땅히 이 뜻을 알라."라고 하며 태종은 폐비문제에 반대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소헌왕후 청송 심씨는 슬픔과 고독, 쓰라린 마음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다스리며 현명하게 대처해 나간다.

 

내명부를 다스릴 때 온화한 성품으로 언제나 공평하고 부드럽게 다스렸지만, 때론 엄정하게 기강을 잡아나갔다.

큰아들 문종의 두 아내를 폐출시킨 것도 내명부 수장 소헌왕후 청송 심씨였다.

 

 

 

언제나 흔들림 없이 세종대왕의 왕비로 내조를 다하였고, 조선의 국모로서 역할을 충실해 해 나갔다.

성군 세종대왕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도 여인들의 궁중 암투를 미리 방지한 소헌왕후의 안정적인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가장 위대한 왕, 성군 세종대왕과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온 정성을 쏟은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청송 심씨를 조선왕조 최고의 왕비로 꼽는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8남 2녀를 두었다.

 

 

성군 세종대왕의 부인(왕비)이며 조선왕조 최고 내조의 여왕, 소헌왕후 청송 심씨는 1446년(세종 28) 둘째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서 52세에 승하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