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비련의 왕비 중종의 부인(조강지처) 단경왕후 거창신씨

by 도생(道生) 2016. 10. 16.

7일 만에 폐위된 비련의 왕비

중종대왕 이역의 부인(조강지처) 단경왕후 거창 신씨

 

 

 

 

 

 

 

 

 

 

 

 

 

 

 

조선 9대 왕 성종의 제1계비 폐비 윤씨의 아들이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고,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파평 윤씨) 아들이 조선 11대 왕 중종대왕 이역이다. 연산군과 중종은 모두 성종의 아들이며 이복형제다.

 

 

조선 9대 왕 성종과 제2계비 정현왕후(자순대비) 사이에서 태어난 진성대군 이역은 12살이 되던 1499년(연산군 5)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13살)과 길례(혼례)를 올린다.

 

 

폭군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조선의 11대 왕으로 즉위한 중종대왕 이역(1488~1544, 재위 1506~1544)의 조강지처는 비련의 왕비 단경왕후 거창 신씨(1487~1557, 재위 1506년 9월 2일 ~ 9일)다.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의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친정 오빠가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이다.

 

비련의 왕비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 중종의 장인이다.

신수근은 연산군 재위 시절 정승까지 지냈다.

 

 

 

 

반정세력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사위 진성대군(중종)을 추대하자고 했을 때 신수근은 거절했다.

딸(단경왕후 신씨)을 위해 누이동생(거창군부인 신씨)을 버릴 수 없었다.

반정을 일으킨 세력은 밀고도 하지 않고 지원도 하지 않은 신수근을 죽인다.

 

 

 

 

연산군의 폭정을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력은 진성대군 이역을 왕으로 추대하여 적통(적자) 왕자로 정통성까지 확보했다.

 

진성대군(중종)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자신이 왕으로 추대되는 사실도 몰랐다. 반정을 일으킨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자 자살을 결심할 정도였다. 진성대군 이역은 반정 세력에 의해 반강제로 왕위에 올랐다.

 

 

 

 

 

 

 

 

 

 

 

 

 

 

1506년(중종 즉위년) 진성대군 이역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즉위하면서 조강지처인 부부인(府夫人, 정1품) 신씨는 조선의 국모, 왕비(단경왕후)에 자리에 오른다. 비련의 왕비가 되는 단경왕후 신씨에게 첫 번째로 날아온 소식은 아버지 신수근의 죽음이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1467~1510), 유순정(1459~1512), 성희안(1461~1513) 등은 조정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왕비의 아버지를 죽인 반정 세력은 후환이 생길까 왕비를 폐위시킬 것을 주장한다.

단경왕후 폐위는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중종의 기세를 애초부터 꺾어버리려는 속셈도 있었다.

 

 

 

 

비련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가 된 지 만 7일 만에 폐위된다.

반정 세력은 고모(연산군의 부인 거창군부인 신씨)와 조카(중종의 조강지처 신씨)를 왕비에서 폐위시켰다.

 

1506년 조선의 국모에서 폐서인 된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아버지가 죽고 친정은 몰락했다.

남편 중종과는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는다.

 

 

 

 

 

 

 

 

 

 

 

 

 

 

1507년 반정공신 박원종의 조카가 중종의 둘째 부인(1491~1515, 1계비 장경왕후)으로 들어온다.

 

박원종은 장경왕후 파평 윤씨와 대윤(大尹) 세력을 이끈 윤임의 외숙부다.

1515년 장경왕후 윤씨는 조선 12대 왕으로 등극하는 원자(인종)를 낳고 25살에 세상을 떠난다.

 

 

 

 

장경왕후가 승하했을 때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모두 죽고 없었다.

 

이때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사림(士林)의 주장을 훈구세력이 반대하였다.

또 생모가 없는 원자(인종대왕)의 문제도 있었다. 중종은 신씨 복위를 주장한 사람을 모두 삭탈관직하고 유배 보냈다. 단경왕후 신씨 복위는 무산되고 만다.

 

 

 

 

1517년 중종은 셋째 부인(1501~1565, 2계비 문정왕후)을 맞는다.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1462~1530, 자순대비 파평 윤씨)는 파평 윤씨 윤지임의 딸을 중종의 세 번째 왕비(제2계비 문정왕후)로 선택한다. 문정왕후와 소윤(小尹) 세력을 이끈 윤원형의 등장으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는 사실상 끝났다.

 

 

 

 

 

 

 

 

 

 

 

 

 

 

조선 12대 왕 인종과 13대 왕 명종은 폐위된 신씨(단경왕후)를 보살펴 주었다.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 4월 6일(1545년)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가 사는 사제(私第)에 전에는 내관(內官)을 차출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지공(支供)하는 도움도 없었으므로 내가 매우 미안하니, 이제부터는 폐비궁(廢妃宮)이라 부르고 모든 일을 자수궁(慈壽宮)287) 의 예와 같이 하라. 여러 후궁(後宮)에게 지공하는 일도 전대로 하고 줄이지 말라고 유사(有司)에 말하라."

 

 

 

명종실록 23권, 명종 12년 12월 9일(1557년)

 

"신씨의 상장(喪葬)을 왕후 고비의 예에 의거하여 시행하고, 3시(時)로 공상(供上)하는 것과 시비(侍婢)를 공궤하는 것을 3년 동안 각사로 하여금 진상하게 하라."

 

 

 

 

 

1544년 11월 15일 39년간 재위한 중종이 57살에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과 소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불과 8개월 보름 남짓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하서 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수렴청정한 문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은 윤원형 등 소윤 세력이 권력을 전횡한다.

 

 

 

 

중종실록 105권 중종 39년 11월 15일(1544년)  

 

"입내(入內)하는 궁인(宮人)이 있어 통화문(通化門)을 시간이 지나도록 열어 놓았기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는데, 들으니 상이 임종시에 폐비(廢妃) 신씨(愼氏)를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입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문을 열어놓고 신씨를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는 대개 헛소문이다.

자세히 물어보니 상의 옥체가 미령하기 때문에 요사스러운 여승들을 불러다 기도를 드리려고 한 것이었다고 했다.

 

 

 

 

 

 

 

 

 

 

 

 

 

 

중종은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를 비롯하여 장경왕후 파평 윤씨, 문정왕후 파평 윤씨와 후궁 등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다.

 

중종은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 사이에 왕자(군과 대군)와 공주(옹주)까지 모두 총 20명의 자녀를 두었다.

중종과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단경왕후 신씨는 1499년 13살에 진성대군(중종)과 부부가 되어 20살이 되던 1506년 7년 만에 강제로 헤어졌다. 

 

단경왕후는 궁궐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 임금이 알아볼 수 있도록 자신이 궁궐에서 입던 치마를 걸어 두어 중종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남편 중종을 그리워하며 단경왕후가 올랐던 인왕산 바위를 사람들은 치마바위로 불렀다.

일본 제국주의는 1939년 '대일본청년단대회' 개최를 기념하는 글을 치마바위에 새겨 넣었다.

 

 

 

1557년(명종 12) 중종의 부인(조강지처)으로 왕비에서 7일 만에 폐위된 비련의 왕비 단경왕후 신씨가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51년 동안 쓸쓸히 남편을 그리워하다 7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마감한다.

 

 

 

 

조선 18대 왕 현종, 조선 19대 왕 숙종 때 단경왕후 복위 문제가 제기됐으나 무산됐다.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어 남편과 생이별하고 애절한 그리움의 비련의 왕비가 된 중종의 부인(조강지처) 단경왕후 거창 신씨는 230여 년 만인 1739년(영조 15) 조선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에 의해 복위되었다.

 

 

영조실록 49권, 영조 15년 3월 28일(1739년)

 

시임·원임 대신과 관각(館閣)의 당상과 육조(六曹)의 참판 이상을 명초(命招)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게 하여 신비의 시호를 단경(端敬)이라 올리고, 능호(陵號)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봉릉 도감(封陵都監)을 설치하고 무인년 장릉(莊陵)을 추복할 때의 예에 따라 이달 30일에 태묘에 고하라고 명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