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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소현세자 이왕(독살설)과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

by 도생(道生) 2016. 10. 21.

인조의 큰아들로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 이왕(독살설)과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

 

 

 

 

 

 

 

 

 

 

 

 

 

 

 

여진족(만주족)은 만주를 통일하고 1616년(광해군 8) 후금(候金)을 창업했다.

 

 

소현세자 이왕(1612~1645)은 능양군 이종(인조, 1595~1649)과 청주 한씨(인렬왕후)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소현세자 이왕이 태어날 때 왕은 광해군(4년)이었다.

당시 인조도 왕이 아닌 능양군이었고 1623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반정의 명분은 크게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중립적인 대청(對淸) 외교문제였다.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잡은 세력은 서인이었지만 조선의 붕당의 모두 대명사대(大明事大)주의자들이었다.

 

 

 

 

 

 

 

 

 

 

 

 

 

 

인조반정으로 능양군 이종이 조선 16대 왕으로 즉위하였고, 1625년(인조 3) 14살의 이왕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인조 5) 소현세자 이왕은 강석기의 딸 금천 강씨(민회빈 강씨)와 가례를 올린다.

 

 

1627년(인조 5) 청나라는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났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조선의 임금,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땅바닥에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청나라는 소현세자와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 부부와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데려가려 하였고 조선 조정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이때 소현세자 이왕은 스스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겠다고 하여 일단락되었다.

병자호란 때 조선 백성 50만 명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청나라에 도착한 소현세자 이영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사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더욱이 가톨릭 예수회 출신 아담 샬이란 신부를 만나면서 서양문물에 눈을 떴다. 천주상과 서적, 물품 등을 선물로 받은 소현세자 이영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신문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조선의 미래를 위해 객관적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세계질서 속에 합류하려 했던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갈등을 해소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를 지켜본 청나라는 소현세자 이왕을 신뢰하게 된다. 

 

 

소현세자 이영은 새로운 관점으로 국제정세를 바라보고 신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개방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명나라의 멸망을 지켜본 소현세자 이영은 대명사대가 아니라 청나라와 실용적인 외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청나라에 끌려가 외국문물에 큰 관심을 두고 청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조선인을 고용해 농사를 짓고 장사는 하는 소현세자의 행적은 모두 인조에게 보고되었다.

  

 

명나라는 1644년(인조 22)에 후금에서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여진족에게 멸망했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 볼모로있던 소현세자 이왕의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과 함께 8년 만에 귀국길에 오른다.

대명 사대주의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청나라와의 외교는 오랑캐에 대한 굴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645년 2월 9일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인조는 친청주의자로 바라봤다.

 

 

 

 

 

 

 

 

 

 

 

 

 

 

오랑캐 여진족(만주족, 청나라)에게 당한 수모와 치욕의 삼전도 굴욕은 인조의 가슴 속에 큰 응어리가 되어 씻을 수 없는 한(恨)으로 남았다. 소현세자가 국제정세를 직시하는 올바른 판단이었다 하더라고 인조에게 불구대천의 원수 청나라에 동조하는 배신자로 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이었다.

당시 숭명사대(崇明排淸) 외교관에서 볼 때 소현세자는 조선의 정책과 정반대되는 오랑캐와 협작한 인물일 뿐이었다.

소중화(小中華)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아버지 인조와 소현세자의 틈이 귀국과 함께 빠른 속도로 벌어졌다.

 

 

혹자는 소현세자에게력을 빼앗길 것 같은 인조가 소현세자 독살(설)을 묵인하였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1645년 4월 26일 조선에 돌아온 지 2개월 여 만에 소현세자 이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실록에서 전한 소현세자 이왕의 병명은 학질(말라리아)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은 여름철 모기가 물려 걸리는 질병이다.

음력 4월 23일 학질(말라리아)에 걸려 3일 만에 급서하였는데, 얼굴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얼굴은 검게 변하였다고 실록은 전한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시신이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독살설이 아직도 화자하고 있다.

 

 

 

 

소현세자에게 침을 논 이형익은 지방을 떠돌던 의원이었다. 소용 조씨(조소용)가 추천하여 불과 3개월 전에 어의가 된 사람이다. 이형익을 처형하라는 주청이 빗발쳤으나 인조는 끝까지 이형익을 보호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갑자기 급서하자 장례절차도 평민처럼 간소화시켰다. 상복을 입는 기간도 3년에서 7일로 축소했다.

왕실의 관례에 따른 세자의 장례 절차를 무시하고 축소하였으며 시신을 담는 관도 '재궁(梓宮)'이 아닌 '널 구柩' 자를 쓰도록 했다.

무덤의 이름도 '원園'이 아닌 '묘墓'로 사용하도록 했다.

 

 

 

 

 

 

 

 

 

 

 

 

 

 

세자가 죽으면 원손이 왕세손이 되어 다음 보위를 이어받는 것이 종법(宗法)제도에 맞는 처사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 이왕의 큰아들 원손 이석철을 폐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 이왕의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강빈(민회빈 강씨)의 친정 강씨 4형제를 유배 보낸다.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올라왔다고 하며 범인으로 소현세자 이왕의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을 지목했다.

 

소현세자 이왕의 부인 강씨는 세자빈에서 폐출 되어 사가에서 사사됐고 어머니와 형제들도 모두 처형됐다.

 

 

 

소현세자 이왕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큰아들 경선군 이석철(1636~1655)과 둘째 아들 경완군 이석린(1640~1648)은 죽고,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이회, 1644~1665))만 살아남아 1565년(효종 7)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1949년(인조 27) 음력 5월 1일 이형익을 불러 침을 맞았고, 음력 5월 8일 인조는 창덕궁에서 학질에 걸려 사망한다.

 

 

 

1718년(숙종 44) 소현세자 이왕의 부인 강빈(민회빈 강씨)은 사후 80여 년이 지나 숙종에 의해 민회빈의 시호가 내려졌다.

소현세자가 묻혀있던 소현묘는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4월 23일(1645년)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診脈)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藥房)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27일(1645년)

 

전일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 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상의 행희(幸姬) 조 소용(趙昭容)은 전일부터 세자 및 세자빈과 본디 서로 좋지 않았던 터라, 밤낮으로 상의 앞에서 참소하여 세자 내외에게 죄악을 얽어 만들어서, 저주를 했다느니 대역부도의 행위를 했다느니 하는 말로 빈궁을 무함하였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숙종실록』 61권 숙종 44년 4월 8일(1718년)

 

 

"내가 강빈의 옥사에 대해 마음속으로 슬퍼해 온 지가 오래 되었다.

작년에 조목별로 열거하여 개서(改書)해서 하교하였던 것은 그 단서를 열기 위해서였다. 금일에 이르러 경연에서 하교하여 자세히 말하였고, 친히 지은 세 절구(絶句)를 잇따라 내어 보여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다 알게 하였으니, 또한 미진한 남은 회포가 없다.

 

아! 하교 가운데 ‘은미한 뜻(微意)’이라는 두 글자는 우리 성조(聖祖)께서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시던 마음을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우러러 알고 있다(仰認)’라고 한 것이다.

 

아아! 원통함을 알고서도 그 억울함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이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지자 공의(公議)도 이와 대동(大同)하니, 신원(伸冤)하는 은전과 차례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을 빨리 유사(有司)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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