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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사살

by 도생(道生) 2016. 10. 26.

1909년 10월 26일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의사

국가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사살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을 앞세운 폭거(暴擧),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강압에 항의하고 주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191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합병한 치욕적인 날로 대한제국 패망일이다.

 

1910년에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대한제국의 백성이 나라의 주권을 찾고, 일본 제국주의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조직한 것이 의병(義兵)이다.

의군(義軍)은 의병(義兵)과 같은 말이다.

 

 

 

 

 

 

 

 

 

 

 

 

 

 

안중근 의사(1979~1910)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고 대한제국의 백성(국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 중장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대한의군은 일제의 강압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불의에 항거한 대한제국의 의병을 뜻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세 번 외쳤다는 러시아 말 '코레아 우레'는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고 '대한제국 만세', 또는 '대한 만세'로 번역해야 맞다.

 

 

 

 

 

 

 

 

 

 

 

 

 

 

1909년 10월 30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밝힌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보면 더 명백하다.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 1, 2, 3, 5번째 이유를 보면 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외친 말이 '대한민국 만세'가 아닌 '대한제국 만세', 또는 '대한 만세'로 해석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대한제국 황후)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이며, 두 번째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이다.

세 번째는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7조약,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죄이고, 다섯 번째는 (대한제국의)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패망하고 고종황제가 승하하면서 촉발된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가 정해졌다.

 

 

 

안중근 의사의 '대한독립'은자주독립국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뺴앗긴 주권을 되찾자는 의미이고,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이후 외친 '대한독립 만세'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공화정체제의 대한민국을 전제로 한 외침이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이등박문(1841~1909, 이토 히로부미)이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고, 이완용, 박제순, 이근용, 이근택, 권중현 등 을사오적과 함께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것을 보고 국권 회복운동에 나섰다.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하고, 일제에 의해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자 안중근 의사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조슈번에서 농민 출신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중간계급의 이토 다케베에의 양자로 들어갔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막부정권 타도를 외치며 일본 왕 메이지를 도와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주도한 인물로 일본의 근대화와 군국주의를 이끌게 된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제국주의 초대 귀족원 의장과 초대 내각총리대신, 5대, 7대, 10대 내각총리를 역임하고, 1906년~1909년까지 조선 통감부 통감을 지냈다. 통감에서 물러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일본 제국주의는 1909년 8월에 이미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을 결정하였고, 러시아를 방문하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기차에서 내려 걸어오던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왕 다음가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사살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제로 침탈한 장본인이며 민족의 원흉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코레아 우레, 즉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친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전국 팔도와 만주 등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활동했다.

대한의군(大韓義軍)은 대한제국의 정식 군대는 아니지만,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대한제국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의병(義兵) 군대, 즉 대한의군(大韓義軍)이다.

 

 

 

 

 

 

 

 

 

 

 

 

 

1910년 3월 25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이란 글을 일본 간수 치바 도시치에서 써주었다.

 

 

32살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으며, 유해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에는 주인 없는 헛무덤 안중근 의사의 가묘만이 있다.

 

 

 

일본인 치바 도시치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유묵을 불단에 바치고 평생 안중근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

 

 

 

 

 

 

 

 

 

 

 

 

 

1963년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표상과도 같은 안중근 의사를 우러러 사모하는 모임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의 초기 이사장과 간부 중 친일파 전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10월 26일은 한 명의 일본인과 한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죽은 날이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한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 사관학교 2기로 졸업한 김재규(1926~1980)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을 저격한다.

 

 

대한민국 5~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충보국(盡忠報國, 충성을 다하여 국가의 보답 한다.) 멸사봉공(滅私奉公, 사를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힘써 일한다.)의 혈서를 쓰고 만주 육군 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2기로 졸업하였다.

일본 육사에 편입하여 57기로 졸업했고 5·16 쿠데타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10월 유신(十月維新)을 단행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광복 후 조선국방경비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로 졸업한 육사 동기생이다.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항일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 집안은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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