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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시대 4대 사화 - 갑자사화(연산군 임사홍)

by 도생(道生) 2016. 10. 29.

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선비들의 재앙)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임사홍, 신수근 등 궁중세력이 사림세력을 숙청한 갑자사화(甲子士禍)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이후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 즉 삼사(三司)에서 연산군에게 직간하는 신하가 사라졌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과 궁중 세력 부중(府中, 조정 대신) 세력을 숙청한 사화(士禍)다.

 

 

 

 

연산군은 갑자사화(1504)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503년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회에서 임금이 따라 주는 술을 흘렸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냈다가 다시 풀어준다. 이세좌는 성종의 명으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인물이다.

 

 

 

1504년에 경기도 관찰사 홍귀달의 손녀가 후궁으로 간택되었으나, 홍귀달이 손녀가 병중이라는 이유를 들어 입궐을 늦춘 사건이 발생한다. 연산군은 이세좌와 홍귀달을 불경죄로 몰아 죽인다.

 

이세좌와 홍귀달의 불경죄 사건은 갑자사화를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죄를 청하지 않은 삼사(三司) 관리에게도 직무유기의 죄를 물었다.

 

 

 

 

 

 

 

 

 

 

 

 

 

 

 

왕실과 인척이며 사돈관계인 임사홍과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은 궁중 세력이다.

 

 

 

조선의 9대 왕 성종은 재위 시 폐비 윤씨 사건을 100년간 발설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사한 불행한 가족사이며, 백성을 위해 선정을 펼쳐야 하는 임금이 복수의 칼을 들면 조정에 피바람이 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종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다.

 

 

임사홍과 신수근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의 사건을 말해주기 전에 연산군은 이미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폭정을 일삼던 조선 10대 왕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 사약을 받고 사사된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들고 나온다.

 

연산군이 아들로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려 효심을 다하고, 폐위된 여인의 아들이 아니라 왕비의 아들로서 임금의 권위도 갖고 싶었을 것이다. 폐비 윤씨에게 제헌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회능으로 승격시키겠다고 한다.

 

 

 

 

갑자사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왕실 인척 임사홍은 부중(府中, 훈구와 사림 세력)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절대 권력으로 복수하려던 연산군과 권력을 탐하려는 임사홍과 신수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연산군은 어머니가 폐비가 되는데 관련된 사람, 폐비 윤씨의 사사와 관련된 사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한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숙청했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이 임금으로 재위 중에 일어났다.

수십 명이 화를 입은 무오사화에 비해 갑자사화는 그 피해가 컸다.

 

약 240여 명이 갑사사화 때 화를 입었으며, 그 중 1백 2십여 명이 처형됐다.  

이미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묻혀 있던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심회, 한치형, 이파 등은 부관참시 되었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궁중 세력 임사홍과 신수근은 폐비 윤씨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부중(府中, 훈구와 사림의 조정 대신) 세력을 일거에 숙청했다.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갑자사화로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손에 쥐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고립됐다.

임사홍과 같은 간신 몇몇을 빼고는 모두를 적으로 만들었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추존된 제헌왕후의 시호는 삭탈 됐고 능도 격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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