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조선 시대 4대 사화 - 기묘사화(중종 조광조)

by 도생(道生) 2016. 10. 30.

조선 시대 4대 사화(士禍, 선비들의 재앙)

1519년(중종 14) 조선 11대 왕 중종과 훈구(공신)세력이 

개혁정치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 세력을 숙청한 선비들의 재앙 기묘사화(己卯士禍)

 

 

 

 

 

 

 

 

 

 

 

 

 

 

 

왕이 될 마음이 없었던 남자, 반정 세력에게 떠밀려 왕이 된 남자 바로 조선 11대 왕 중종이다.

1506년 반정에 성공한 훈구(공신)세력이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중종 재위 초기는 반정공신 박원종(1467~1510), 성희안(1461~1513), 유순정(1459~1512)의 세상이었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세상을 떠나자 훈구(공신)세력이 주춤한 틈을 이용하여 중종은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하기 위해 사림세력을 등용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다.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세 번째 사화인 기묘사화는 중종과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숙청한 사화다.

 

 

 

 

 

조광조(1482~1520)를 비롯하여 김식, 김구, 기준, 한충 등 진보적 신진 사림세력성리학적 이상 사회건설이라는 도학 정치를 추진해 나갔다.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조광조와 사림 세력은 도교의 제천행사를 지내는 소격서 폐지, 추천(천거)으로 등용하는 현량과 제도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중종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기득권 세력인 훈구(공신)세력의 반발이 있었으나 통과됐다.

 

 

조광조 등 진보적인 신진 사림세력은 보수적인 훈구(공신)세력에 맞서 개혁의 의지로 현실정치에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조광조 등 신진 사림세력의 급진적 개혁정치로 기묘사화를 촉발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위훈삭제'다.

 

훈구(공신)세력 중 위훈(僞勳, 거짓 공로)을 삭제하자는 '위훈삭제(僞勳削除)'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과 반정공신 세력에 정면도전이며 선전포고와 같았다. 성리학적 이상 사회건설을 위해 위훈 삭제는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조광조 등 신진 사림세력은 주장은 관철되었다.

 

 

중종은 과거 훈구세력 때문에 왕권이 힘을 쓸 수 없었고, 이제는 사림 세력 때문에 왕권이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훈구(공신)세력 입장에서는 권력의 주도권을 사림세력에게 빼앗겼고, 이제는 밥그릇마저 뺏기는 상황이 되었다.

 

 

 

 

 

훈구(공신)세력은 중종반정의 공신 홍경주의 딸이며 중종의 후궁인 희빈 홍씨와 결탁하여 역모사건을 만든다.

홍경주, 심정, 남곤 등 기득권 세력 훈구(공신)은 신진 사림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만든 역모 사건이 바로 '주초위왕' 사건이다.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남곤(1471~1527)은 사림(士林, 선비)세력이었으나, 조광조와 사림세력에 등을 돌리고 훈구(공신)세력과 손을 잡고 기묘사화를 일으킨다.

 

 

 

 

주초위왕(走草爲王)은 '주走' 자와 '초草' 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된다.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고 중종은 조광조를 가차 없이 버린다.

 

1519년(기묘년, 중종 14) 조선 시대 4대 사화 중 세 번째 일어난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사림 세력을 숙청당하게 된다.

중종과 훈구(공신)세력이 주도한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졌으나 심정이 중종에게 상소하여 결국 사사되었다.

 

 

 

 

 

 

 

 

 

 

 

 

 

 

자신을 중용한 임금이었으며 정치적 후원자이며 동반자였던 중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왕도정치와 도덕정치로 부정과 부패를 청산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건설을 꿈꾸던 개혁정치가 정암 조광조의 꿈은 기묘사화로 물거품이 되었다.

 

 

임금이 계신 한양 도성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중종이 내린 사약 한 사발을 마시고 죽지 않자 다시 사약 한 사발 더 마시고 절명했다.

 

 

정암 조광조가 남긴 절명시(絶命詩)

 

'임금을 어버이같이 사랑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같이 하였다.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리라.'

 

 

 

 

조선 12대 왕 인종 때 복권되었다가, 13대 왕 명종 때 추탈됐다.

조선 14대 왕 선조 때 다시 복권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던 정암 조광조를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은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으나,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않고 지나치게 급진적 개혁을 하였던 점과 정치적 타협 없는 조급함이 개혁실패와 죽음을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학자 네명과 다섯 명을 동방4현과 동방5현이라 부른다.

김종직의 제자가 김굉필과 정여창이며, 정암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다.

 

동방사현(東方四賢)은 한훤당 김굉필(1454~1504), 일두 정여창(1450~1504), 정암 조광조(1482~1519),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동방오현(東方五賢)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1502~1571) 다섯 명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