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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기축옥사- 서인 정철과 정여립 모반(역모)사건, 동인 몰락

by 도생(道生) 2016. 11. 1.

조선왕조 최대 피의 숙청 사건 - 정여립 역모(모반)사건이 불러온 피의 광풍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서인(西人) 정철이 주도한 피의 숙청 기축옥사와 동인(東人)의 몰락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때까지 훈구(공신)세력과 사림(士林, 선비)세력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왔다.

 

선조 때 이르러 사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시작된 개인적인 앙금은 1575년(선조 8) 사림(士林)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면서 정치적 대립관계 유지하는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사건으로 촉발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기축년, 선조 22)에 시작하여 1590년(경인년, 선조 23), 1591년(신묘년, 선조 24)까지 3년 동안 계속된 옥사(獄事)로 서인에 의해 동인이 몰락하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된 피의 숙청을 말한다.

 

 

조선의 정승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숙청된 기축옥사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무오사화(연산군 4, 1498년), 갑자사화(연산군 10, 1504), 기묘사화(중종 14, 1519년),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년)에서 희생된 500여 명의 두 배가 넘는 1천여 명이 희생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

 

 

정여립(1546~1589)은 서인(西人) 율곡 이이(1536~1584)와 우계 성혼(1535~159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인 세력으로 관직에 들어온 정여립은 스승 율곡 이이가 사망하고 동인(東人)으로 전향한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정여립이 모반(謀反))을 주도했다는 역모사건의 조직 대동계는 기축옥사(1589년)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587년(선조 20) 전라도 손죽도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정여립이 조직했다.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은 서인에게 비난을 받고 선조는 중용하지 않자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낙향하여 인근 지역의 관리와 선비들과 교류했다. 정여립은 한동안 김제에서 지내다 전라북도 진안으로 거처를 옮긴다.

 

1589년(선조 22) 10월 황해도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신청 군수 한응인이 황해도 관찰사 한준에게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을 고변하고 황해도 관찰사 한준은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정여립이 한양의 한강이 얼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거병해서 한양 도성에 입성하여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즉시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잡아들이라고 하였고,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있는 사람은 모두 잡혀왔고 체포된 사람들은 국문(鞫問) 중에 견디기 어려운 고신을 받았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다수가 동인이었으며, 특히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 문하의 선비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의 당사자 정여립과 그의 아들은 전라도 진안 조도에서 자결하였다.

 

역모와 연루된 것으로 의심돼 잡혀온 사람 중에 끝까지 역모사건이 아니라고 견디다 죽은 사람도 있고, 고문을 견디지 못한 일부 사람은 역모사건이라고 자백하기도 했다.

 

 

 

 

정여립의 모반(謨反)사건은 말 그대로 역모를 준비한 사건이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대동계는 황해도 지역까지 진출했고, 대동계의 핵심 지역인 전라도가 아닌 황해도에서 정여립의 역모를 고변하는 일이 발생한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은 역모 관련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일부 사람의 자백만 있다.

 

 

왜인 토벌을 위해 조직됐던 대동계와 정여립의 자살로 정여립의 모반은 기정사실화됐다.

일부 관련자의 자백과 정여립의 자결은 선조와 추국청은 정여립이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단정 짓는 결과가 된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으로 시작된 기축옥사에서 희생된 대부분 사람이 동인이었으나 정치와는 무관한 주변인물까지 희생됐다.

선조 재위 당시 일어난 기축옥사는 학자이며 정치인이었던 서인과 동인, 송강 정철과 서애 류성룡 등 붕당정치가 만든 첨예한 정치적 대립 속에 일어난 사건이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이 사실이든 조작이든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까지 1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는 사림(士林, 선비)이 많이 희생되어 기축사화(己丑士禍)로도 불린다.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기축사화의 정점에는 3년 후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백성을 모두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한 선조가 있다.

 

 

 

 

정여립의 모반(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는 사림(士林, 선비)세력 간의 대충돌이며 피의 숙청이고 피의 광풍이다.

서인 정철이 주도한 기축옥사로 동인은 몰락의 위기를 맞고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됐다.

 

 

혹자는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조선왕조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동인(東人)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죽는다.

이발과 이발의 형제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과 80세 늙은 노모까지 혹독한 국문과정에서 죽어나가자, 국문에 대한 백성의 비난 여론이 거세진다.

 

 

 

기축사화 당시 국문을 지휘한 추국청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인 정철이었는지, 동인 류성룡이었는지를 두고 광해군 때부터 4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첨예하게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서인 정철과 동인 류성룡 두 사람 중 추국청의 위관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정여립 모반(역모)사건이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문제로도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었으면 서인과 동인 간의 당쟁 권력 투쟁으로 말미암은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작이 크게 의심되고, 동인 류성룡이 위관이었으면 진짜 역모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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