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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태종 이방원(왕권) 삼봉 정도전(신권) 1차 왕자의 난

by 도생(道生) 2016. 11. 2.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

왕권정치와 신권정치의 정면 대결 - 1차 왕자의 난

 

 

 

 

 

 

 

 

 

 

 

 

 

 

 

 

조선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며, 조선 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창업한 근세조선의 개국공신 중 삼봉 정도전은 자타가 인정하는 단연 최고 일등공신이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의 장자방이며 최고의 책사로 조선건국의 설계자이며 기획자였다.

 

 

 

 

조선은 창업 때부터 커다란 불씨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은 성리학적(주자학, 유교) 왕도정치, 즉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이라는 같은 꿈을 꾸었다.

그러나 왕권(王權) 중심의 조선을 생각하고 있던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신권(臣權) 중심의 조선을 생각하고 있었던 삼봉 정도전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은 개국공신 배제와 왕권계승문제, 즉 왕세자 책봉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더불어 태종 이방원의 왕권중심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과 삼봉 정도전의 신권중심으로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의 대립이 피를 부른 1차 왕자의 난을 촉발한 한 원인이 된다.

 

 

 

 

 

 

 

 

 

 

 

 

 

 

 

 

1392년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군주로서 왕세자를 책봉하는 권한을 가진다.

왕세자 책봉은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면 다음 보위에 오르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은 다음 왕 결정과 다름없다.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이며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의안대군 이방석은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로 적장자가 아닌 서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로 아들로서는 여덟째가 된다.

 

 

 

 

1392년은 조선이 창업한 해로 조선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여 종법(宗法) 질서 및 조선의 모든 제도 자체가 아직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래서 1392년 왕세자 책봉 때 조선 조정의 중론도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정실의 아들)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왕세자로 세워야 한다.'라는 의견이 원칙이었다.

 

 

성리학적 종법 질서(宗法秩序, 종법제도)는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구조에 관한 질서다.

질서(秩序)라는 말 자체가 혼란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차례라는 의미이듯이 왕실에서도 다음 보위에 오를 왕세자 또는 왕을 책봉하는 제도에서 차례에 맞게 적장자(嫡長子, 정실의 아들)가 일차적으로 그 지위를 상속하는 제도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8월 20일(1392년, 태조 1년)

 

어린 서자(庶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

처음에 공신(功臣)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로로써 청하고자 하니,

임금이 강씨(康氏)를 존중하여 뜻이 이방번(李芳蕃)에 있었으나, 이방번은 광망(狂妄)하고 경솔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공신들이 이를 어렵게 여겨, 사적으로 서로 이르기를, "만약에 반드시 강씨(康氏)가 낳은 아들을 세우려 한다면, 막내 아들이 조금 낫겠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누가 세자가 될 만한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장자(長子)로써 세워야만 되고,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써 세워야만 된다고 간절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극렴이 말하기를, "막내 아들이 좋습니다."하니, 임금이 드디어 뜻을 결정하여 세자로 세웠다.

 

 

 

삼봉 정도전이 저술한 『조선경국전』의 '세자를 정함'에는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先王)이 장자(長子)를 세자로 세웠으니 (형제간)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賢子)를 세운 것은 덕(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방석은 적장자가 아닌 서자이며, 장자가 아닌 여덟째 아들이다.

11살의 어린아이가 총명하고 자질이 엿보였다고 할 수 있으나 어질고 현명하다고 볼 수 없다.

태조 이성계가 서자이며 여덟째 아들인 의안대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지만, 그 뒤에는 신덕왕후 강씨와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삼봉 정도전은 종법(宗法)제도와 자신이 조선의 건국이념과 통치 강령을 기 조선경국 스스로 파괴한 장본인이며, 조정의 중론(衆論)도 무시하여, 태종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도록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다.

 

 

 

 

 

 

 

 

 

 

 

 

 

 

이성계가 50이 가까워 얻은 11살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왕세자 책봉 결정은 태조 이성계가 하였지만, 실제 결정은 삼봉 정도전이 하였고 형식적인 절차만 거친 것이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뿐만 아니라 신하인 삼봉 정도전에게도 스승의 예로 대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3권 2월 4일(1398년, 태조 7년)

 

임금이 송헌 거사(松軒居士)로 호(號)를 하였다.

임금이 좌승지(左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전조(前朝)의 충숙왕(忠肅王)이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에게 글을 보내었다. 나도 또한 봉화백(奉化伯)에게 거사(居士)라고 일컬어 글을 보내려고 하는데, 무엇으로 호(號)를 할까?" 하니, 문화가 대답하였다. "상감의 잠룡(潛龍) 때의 헌호(軒號)가 어떠합니까?" 임금이, "좋다"하고, 드디어 송헌(松軒)으로 호를 하였다,

 

-왕(이성계)이 신하(정도전)에게 자신을 송헌거사로 낮춰서 편지를 보냈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살았던 곳이 송헌-

-삼봉 정도전이 창업의 공로로 받은 봉작(작위) 봉화백-

 

 

 

 

삼봉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창업의 최고 일등 공신이다.

조선을 설계한 정치가이며 대학자로서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과는 상관없이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을 제공한 장본인이 삼봉 정도전이다. 그는 이성계의 조강지처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다.

 

 

 

 

 

 

 

 

 

 

 

 

 

 

조선의 기획자 삼봉 정도전은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의 모체가 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국가 통치규범을 마련한 조선경국전을 저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사상이 집약된 재상(신권)중심의 정치조직체제를 기록한 경제문감도 저술하였다.

 

숭유억불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한 『불씨잡변』을 저술하였고, 한양 도성(경복궁)을 설계하고 북벌을 준비하기도 했다.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의 뛰어난 업적은 조선왕조가 500 동안 지속하는데 기반이 되었다.

 

 

 

 

1차 왕자의 난은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은 대결이며 왕권과 신권의 정면 대결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왕권정치와 신권정치의 틀을 세우려는 두 사람의 대결에서 삼봉 정도전이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에게 패하며 정도전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만고역적으로 낙인찍혀 있다가 조선이 패망의 길을 걸어가던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재건과 함께 복권되었다.

 

 

 

 

 

 

 

 

 

 

 

 

 

 

왕(王)은 하늘에서 정해주는 자리, 즉 천명(天命)에 의해 정해지지만, 국가 운영은 비록 자질과 능력이 부족한 임금이 보위에 있더라도  능력 있고 충성스러운 신하(재상)들만으로도 충분히 성리학적 이상 국가건설, 즉 왕도정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삼봉 정도전이 술에 취하면 가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한다.

"한(漢)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고조를 쓴 것이다."

 

삼봉 정도전의 이 말은 한고조 유방은 하늘이 낸 임금이지만, 실제 한(漢)나라를 세운 건 한고조 유방이 아니라 장자방(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앞세워 한(漢)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삼봉 정도전 자신은 조선의 장자방(장량)이고, 태조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에 비유하였다.

 

 

 

   

 

왕권중심의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추구했던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신권중심의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추구했던 삼봉 정도전의 정면 대결,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 흥안군(신덕왕후 사위 이제), 삼봉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유만수 등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이 대결한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태조 이성계는 조강지처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영안대군 이경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영안대군 이경이 1398년 조선의 2대 왕 정종으로 즉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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