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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태종 이방원 이방간 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6. 11. 3.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회안대군 이방간의 권력 최정점을 향한 정면 대결

- 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

 

 

 

 

 

 

 

 

 

 

 

 

 

 

 

1398년(태조)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은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정도전 세력과 정면 재결이었다.

조선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태조 이성계의 서자이며 여덟째 아들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다.

 

 

 

삼봉은 조선을 설계한 기획자다.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상대였던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이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 안 되었다. 신권(臣權) 중심의 정치를 구상했던 삼봉 정도전과 왕권(王權) 중심의 정치를 구상했던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은 절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과도 같았다. 

 

 

 

 

 

 

 

 

 

 

 

 

 

 

흔히 왕자의 난은 태종 이방원이 왕이 되기 위한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삼봉 정도전 역시 이방원 못지않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태종(정안대군) 이방원과 삼봉 정도전의 권력에 대한 욕구는 권력 전횡하여 부정부패로 호의호식하기 위해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다. 새 나라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 조선왕조가 만세(萬世)토록 지속하기를 바랬다.

 

 

 

 

 

조선 창업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것이 이방원과 정도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여 아들 세종대왕이 성군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조성했다. 삼봉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답게 조선 왕조 500년의 사상 및 제도적 통치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이방원의 손에 죽어간 사람이 수없이 많다. 정도전 역시 그가 기획한 조선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후대의 사람이 창업의 역사란 죽고 죽이는 과정을 거쳐왔다고 할 수 있으나, 이방원과 정도전 때문에 죽어간 원혼들과 그 후손이 두 사람에게 면죄부를 줄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신생국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왕권을 중심으로 할 것이냐, 신권을 중심으로 할 것이냐 하는 국정 운영에 대한 생각이 달랐고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결국, 1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정도전 일파가 죽고, 이복형제 이방번과 이방석 등이 골육상잔의 비극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이방석은 폐세자가 되어 죽었다.

하륜과 이거이 등이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방원은 적장자(정실의 아들)로 장자승계의 원칙에 따라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영안대군 이방과(정종)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어쩔 수 없이 이방과가 세자가 된다.

 

 

 

태조 이성계는 왕위 자리를 내놓고 왕세자 이방과가 조선의 2대 왕으로 보위에 오른다.

1399년(정종 즉위년) 정종은 피비린내가 나는 한양을 버리고 수도를 개성으로 옮긴다.

조정은 이방원과 그 일파가 장악하여 국정을 운영한다.

 

 

 

 

 

 

 

 

 

 

 

 

 

 

골육상잔의 비극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정안대군(태종) 이방원과 회안대군 이방간의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다.

박포의 난, 이방간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2차 왕자의 난은 다음 왕위에 오를 왕세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피바람이다.

 

 

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억지로 왕위에 오른 정종과 다음 왕위를 둘러싼 왕자들, 특히 태조 이성계의 5남 정안대군 이방원과 4남 회대군 이방간은 서로 견제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조선의 2대 왕 정종은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조차 없었다.

종이 9명의 후궁에게서 10명의 넘는 아들을 두었지만, 모두 서자이며 적장자(정실의 아들)는 없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활약한 박포는 자신의 공로에 비해 낮은 벼슬을 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정종에게 다음 왕위를 이를 적장자가 없음은 회안대군 이방간으로 하여금 왕세자 자리에 대한 야심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방간은 공훈, 학식, 인맥, 환경 등 모든 면에서 동생 이방원 보다 뒤떨어져 있어서 쉽게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동생 이방원을 왕권 다툼의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박포는 황해도 서북면에서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회안대군 이방간을 찾아가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이 대군을 일으켜 이방간을 죽이고 휘하 부대를 해산하려 한다는 거짓말로 불같은 성격을 가진 이방간을 부채질하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2차 왕자의 난은 이방간과 박포가 일으킨 난이라 하여 이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린다.

1400년 1월에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다. 이방원과 회안대군 이방간은 개경에서 맞붙어 수적으로 우세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이방원이 승리한다. 회안대군 이방간은 체포하여 유배 보내고, 박포를 처형했다.

 

 

이방원 측 소수 인원이 희생됐지만, 2차 왕자의 난, 즉 박포의 난은 일방적으로 끝나고 만다.

조정에서는 회안대군 이방간을 처형해야 한다는 탄핵이 계속됐지만, 이방원은 형 이방간의 목숨을 끝까지 보존해 주었다. 

 

 

 

 

 

회안대군 이방간과 박포가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정안대군(태종) 이방원은 왕세제(王世弟, 왕세자)로 책봉된다.

이때 자신이 앞장서서 반대했던 왕족과 권신들의 사병을 혁파하여 삼군부에 편입시킨다. 

왕세제 이방원은 1400년(정종 2) 정종의 선위로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한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살육을 벌이며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공신과 외척 세력을 숙청하는 한편,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조선의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세종대왕 태평성세(太平聖歲, 태평성대)의 기반을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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