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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사육신과 함께 충절을 지킨 매월당 김시습 등 생육신

by 도생(道生) 2016. 11. 7.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忠節, 충성과 절의)을 지킨

매월당 김시습, 미수 성담수, 경은 이맹전, 관란 원호, 어계은자 조려, 추강 남효온 - 생육신(生六臣)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 신숙주 등이 결탁하여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1453년, 단종 1)이 끝나고, 1455년(단종 3)에 조선 6대 왕 단종대왕은 수양대군에게 전위한다. 1455년(세조 즉위년) 수양대군이 조선 7대 왕으로 즉위하고,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모두 죽었다.

 

 

 

목숨을 바쳐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사육신과 함께 왕위찬탈을 한 수양대군을 왕으로 섬길 수 없다며 벼슬을 버리거나 방랑과 은둔 생활을 했던 여섯 분을 말한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 미수(眉) 성담수(미상~미상), 추강(秋江) 남효온(1454~1492), 관란(觀瀾) 원호(1397~1463), 경은(耕隱) 이맹전(1392~1480), 어계 은자(漁溪隱者) 조려(1420~1489)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신동과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특하여 세종대왕이 5살의 어린아이 김시습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생육신 중 유일하게 벼슬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린 조선 최고의 문인이며 사상가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조선 팔도를 방랑하며 떠돌아다녔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미수 성담수는 사육신 성삼문과 6촌 형제간이다.

성담수의 아버지 성희는 고문과 유배생활에 사망하였다.

 

단종복위사건을 주도한 성삼문과 친척이었기 때문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고 유배되었다.

유배가 풀린 후로도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며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둔하였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관란 원호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원주로 내려가 은둔하였다. 원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원주 원씨다.

 

어머니 원씨는 고려 말 대학자로 환단고기 삼성기의 저자 운곡 원천석(원동중)의 조카다.

원천석(원동중)은 태종 이방원의 스승으로 이방원이 관직을 주려고 직접 찾아왔으나 거부하고 은둔하였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경은 이맹전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전초전인 계유정난 후 예문관 직제학으로 있던 장인 김성미와 함께 신병(身病)을 핑계로 한양을 떠나 고향 경상도 선산으로 내려간다.

 

경은 이맹전과 장인인 김성미는 단종이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되자, 주군(主, 임금)이 계신 강원도 영월을 향해 매일 절을 올리며 평안하시기를 기원했다. 이맹전은 당시 선산 부사로와 있던 성리학의 영수(종사) 김종직과 교류한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된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어계은자 조려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고향 경상도 함안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임금이 계신 강원도 영월 하늘을 바라보며 지냈다.

 

조려의 임금을 향한 마음은 단순히 그리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경상도 함안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머나먼 길을 걸어가 직접 알현했다. 단종대왕이 승하하자 강원도 영월까지 달려갔고,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억울하게 먼저 가신 주군의 명복을 빌었다.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 추강 남효온은 자신이 집필한 『추강집』에서 사육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바로 「육신전」이다. 추강 남효온은 김종직이면서 매월당 김시습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문종대왕의 왕비이며 단종대왕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가 서인으로 강등되고 능을 물가로 옮기자 남효온은 소릉의 회복을 상소하였다. 현덕왕후의 능이 옮겨지지 않자 세상을 등지고 명산대천 유랑 길에 올라 은거한 선비와 교류하며 글을 썼다.

남효온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당한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사육신이 집현전에서 함께했던 친구이며 동지였다.

생육신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원호, 이맹전, 조려는 조정에서 관직과 고향, 학문의 맥도 달랐지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의 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내놓고 조선 팔도를 떠돌거나 고향으로 내려와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거한 인물들이다.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에 비분강개하여 수양대군이 다스리는 조선 조정과 등을 지고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한 선비가 많았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충신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고, 권력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과감하게 버린 사육신과 생육신은 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조 5년과 6년에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 관란 원호, 추강 남효온, 미수 성담수, 어계은자 조려, 경은 이맹전에게 이조 판서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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