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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왕조시대 3대 간신 - 유자광, 임사홍(임숭재), 김자점

by 도생(道生) 2016. 11. 9.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공욕(公慾)을 버린 

조선왕조 시대 3대 간신 - 유자광, 임사홍(임숭재), 김자점

 

 

 

 

 

 

 

 

 

 

 

 

 

 

 

 

 

간신(奸臣)은 세상의 모습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군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온갖 아부와 아첨, 감언이설로 절대권력자의 눈과 귀만 즐겁게 해주는 자들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한 공욕(公慾)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절대 권력에 빌붙고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부패 등을 일삼아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자들이 간신(奸臣)이다.

 

 

조선왕조 시대에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전횡하여 나라의 기강과 근간을 흔든 간신은 한명회, 유자광, 김자점, 윤원형,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父子), 이이첨, 홍국영을 비롯하여 숱하게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자광, 임사홍(임숭재), 김자점을 조선왕조시대 3대 간신으로 말한다.

 

 

 

 

 

간신은 비열하고 배신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간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을 탐하는 간신은 눈치도 빠르고, 때론 잔악한 면도 있으며 임기응변에도 능한 처세술의 달인이다.

그러나 아래는 아예 안 보고 위만 바라보며 아첨하는 간신들은 결국에는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지탄을 받는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 간신(奸臣)이 나타나고, 간신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유자광과 임사홍, 김자점은 조선 시대 3대 간신으로 지존의 자리에 있던 왕의 절대 권력에 빌붙어 권력을 전횡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사익을 추구한 인물로 나라와 백성에게 해를 입힌 인물들이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간신 첫 번째 유자광(1439~1512, 세종 21~중종 7)

 

유자광은 첩의 자식이란 굴레 속에서 멸시를 받고 자랐다.

재주와 용맹을 뛰어났으나, 서출이라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감사(직업군인) 길을 택한다.

 

 

이시애의 난(1467년, 세조 12) 진압에 참여하고 남이 장군을 모함(1468년, 세조 13)하여 죽게 만드는 과정에서 공훈을 인정받아 공신첩을 받았다.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와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를 일으킨 장본인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주도아래 중종반정(1506년)이 일어나자 반정 세력에 가담하여 공신이 된다.

사간원, 사헌부 등에서 유자광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1512년 몇 번이 유배지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병들어 죽었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등 다섯 명의 임금을 모시면서 수많은 사람을 음해하고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 본인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혹자는 훈구(공신)세력과 사림(士林, 선비) 세력이 서자 출신으로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을 무시하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도 말한다. 유자광은 조선 시대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서자에서 정 1품까지 올랐으며, 무령부원군의 봉작까지 받았다.

유자광은 1908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의 주도 아래 복권된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간신 두 번째 임사홍(1445~1506, 세종 27~ 중종 1)과 아들 임숭재 

 

임사홍의 부인은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손녀다.

임사홍의 장남 임광재는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의 남편이다.

임사홍의 넷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서녀 휘숙옹주의 남편이다. 

임사홍은 두 아들을 두 임금의 딸과 혼례 시켰고, 자신 또한 왕실의 인척이었다.

 

 

 

임사홍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하였다.

음서제(양반 자제 특채)로 조정에 들어갔지만, 관직에 있으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유자광과 임사홍은 한때 결탁하여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父子)는 연산군의 명으로 조선 팔도의 미인을 뽑아 한양으로 보내는 채홍사의 역할도 하였다.

무엇보다 사사롭게는 사돈이면서 주군이었던 성종대왕의 유지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배신의 길을 걸어간다.

 

성종은 승하하기 직전 폐비 윤씨의 일을 앞으로 100년간 발설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임사홍은 주군을 배신하고 신수근과 결탁하여 폐비 윤씨의 일을 연산군에게 말해 갑자사화의 피바람을 만든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로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자신의 셋째 아들 임희재와 사촌 동생도 유배된다.

1505년 연산군에게 빌붙어 아버지 임사홍과 함께 승승장구하며 국정을 농단했던 넷째 아들 임숭재가 병으로 죽는다.

1506년 중종 반정이 일어나면서 뛰어난 학식과 비상한 머리를 가졌던 임사홍은 척살되고 얼마후 부관참시까지 당한다.

 

 

혹자는 임사홍이 채홍사를 한 사실을 때문에 간신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고도 하지만, 연산군의 폭정에 부채질을 한 갑자사화의 장본인임은 틀림없다.

 

 

 

 

 

 

 

 

 

 

 

 

 

 

 

 

조선왕조 시대 3대 간신 김자점(1588~1651, 선조 21~ 효종 2)

 

 

김자점은 어려서 대학자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였고, 음서(음보)제로 광해군 때 조정에 출사한다.

김자점은 인조반정(1623년)의 공신으로, 사사롭게는 인조와 사돈이며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1624년 이괄은 인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인조와 함께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갈 때, 감옥에 있던 사림(북인) 수십 명을 죽였다.

인조와 후궁 귀인 조씨(숙원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명옹주가 손자 김세룡과 혼례를 올린다.

 

 

 

 

 

1644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죽인다.

김자점은 한때 임경업 장군을 두둔하고 감싸기도 했으나,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자 심기원 역모사건에 임경업이 연류되었다고 무고하였고, 결국 임경업 장군은 김자점에 의해 억울하게 죽는다.

 

 

 

숙원 조씨와 작당하여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를 죽이고,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일에 앞장섰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친청(親淸)파로 벌에 반대했던 김자점은 탄핵당한다. 

 

1650년 유배 중에 효종의 북벌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였고, 1651년 인조와 귀인(숙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역모가 적발되어 김자점은 능지처참 되고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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