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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0년,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략한 정유재란

by 도생(道生) 2016. 11. 14.

선조 30년(1597년), 일본(왜군)이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략한 정유재란

 

 

 

 

 

 

 

 

 

 

 

 

 

 

 

1592년(선조 25) 일어난 일본의 첫 번째 조선 침략전쟁, 임진왜란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 가도입명假道入明)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 노예전쟁, 살육전쟁, 무역전쟁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년(1597년)에 왜군이 재차, 다시, 거듭, 두 번째로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란 의미다. 

임진왜란에 이어 일본의 재침략인 정유재란(선조 30)은 그 양상이 달랐다. 조선이 일본의 공격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발발하고 조선이 배제된 상태에서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강화회담이 결렬되면서 일본이 재침략한 전쟁이다.

남해안 일대에서 성을 쌓고 있던 왜군과 열도에서 온 병력까지 약 15만 명이 조선 강토를 또다시 유린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 강화회담에서 요구를 보면 침략욕, 일본 정국의 안정과 불평세력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크게 네 가지다.

명나라 황녀와 조선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조선분할과 함께 '감합인(勘合印) 복원(무역)'이었다.

 

 

 

1510년 삼포왜란(중종 5)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무역량을 절반으로 줄였고, 중국은 해안을 봉쇄하였다.

1588년(선조 20)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지만, 조선은 거절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신사 파견 요청을 성사시키지 못한 사신과 그의 가족까지 죽여버린다.

 

1590년 일본을 통일하고 영토확장과 군사적 경제적으로 대일본을 꿈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택한 것이 1592년 조선침략이었다.

 

 

 

 

 

 

 

 

 

 

 

 

 

 

일본의 조선 2차 침략전쟁 정유재란(선조 30)은 1592년에서 1597년까지 일어난 1차 침략전쟁 임진왜란보다 피해가 더 컸다.

임진왜란의 명분이 명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조선을 공격했다면, 정유재란의 전쟁 대상은 조선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를 베어 소금에 절여 오도록 명령한다.

왜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 방화는 임진왜란 약 6년간의 피해보다 정유재란 1년여의 짧은 기간의 피해가 더 컸다. 

 

더욱이 임진왜란에서 수군을 지휘하여 연전연승한 이순신 장군정유재란 직전 선조가 파직하여 조선 수군이 왜군에 의해 전멸당하다시피 했다. 또, 임진왜란 당시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분연히 일어나 왜군에게 큰 피해를 준 의병이 임진왜란 때처럼 활발한 활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약 15만 명이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1차 침략전쟁에서 점령하지 못했던 곡창지대 전라도를 한동안 점령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약 7년간 걸친 전쟁은 명나라와 조선의 승리도 아니며, 그렇다고 일본의 패전도 아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난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관군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최대 1백만 명이 사망했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8년 7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왜군의 철수를 결정한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시작되어 근 7년을 지속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1598년 말에 마침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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