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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by 도생(道生) 2016. 11. 20.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왜군보다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전쟁을 치렀다.

일반 백성과 의병, 승병이 합세하였지만, 수적인 열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왜군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자는 뜨거운 열망은 명량대첩과 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적의 역사를 만든다.

 

 

최소 몇 배에서 10배가 넘는 왜군과 결전을 치른 전투로 행주대첩,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황석산성대첩, 이치대첩 등 임진왜란의 대다수 전투가 수적 열세에서 치러졌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약이 깨지자 일본은 1597년 8월 정유재란으로 다시 조선을 침략한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7년 2월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근 한 달 가까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역적으로 몰려 죽음에 위기에 처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이순신 장군을 구명한 사람은 남명 조식 선생에게 큰 가르침을 받고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약포 정탁이다.

우의정 정탁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 신구차(伸救箚) 상소를 선조에게 올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4월 1일 풀려나 백의종군하게 된다.

 

4월 27일 도원수 권율 장군이 있던 순천에 도착하여 있던 중 7월 15일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죽자 이순신 장군은 7월 22일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기 전까지 옥포해전합포해전적진포해전사천해전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 장림포해전, 화전구미해전, 다대포해전, 서평포해전, 절영도해전, 조량목해전, 부산포해전, 웅포해전, 2차 당항포해전, 장문포해전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여러 해전 중 단연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해전은 명량해전(명량대첩)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파직되고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1597년 7월 15일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과 맞붙는다. 

100여 척이 넘는 전선과 1만 명이 넘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며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죽고, 패잔병과 12척의 배만 남게 된다.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대파한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에 이어 1597년 재침한 정유재란에도 똑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육상 왜군의 진격과 함께 수군은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쳐 한양으로 북상하려했다.

 

일반적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12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무찌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13척의 배로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1597년(선조 29) 9월 16일 진도 울돌목(명량)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일본 수군을 대파한 명량대첩에서 조선 수군이 몇 척의 배로 왜군과 싸웠는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나온다.

 

명량대첩이 끝나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 사령부인 제독총병부에 공식적인 문서(이자移咨)를 통해 적의 동태와 전과를 알리면서 자문을 보낸 내용이 나온다.

 

 

 

선조실록 94권, 선조 30년 11월 10일(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치계에 의하면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병선과 병기가 거의 다 유실되었다.

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 해로의 요구를 차단하고 있었는데, 적의 전선 1백 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오기에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 현령 안위 등과 함께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운바...

 

 

 

 

명량대첩을 기념하여 숙종 14년(1688)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해남군 문내면에 건립한 명량대첩비에도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무찌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조는 조선 수군을 없애려 하였다.

일본 수군에게 대패하여 전선 대부분 격파되고 병력을 상실한 조선 수군으로는 일본 수군과 맞붙어 승산이 없을 것이니 육지에서 싸울 것을 명하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신에게는 전선 12척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12척으로 기록되어 있고, 현충사 이순신 장군 기념관에는 13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장계를 올릴 당시에는 12척이었으나,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때는 송여종(또는 김억추)이 파손된 전선을 수리 또는 건조를 통해 1척이 더 추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적의 역사를 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육상에서 조선은 연전연패하며 왜군이 북진하여 충청도에서 명나라 군대와 대치 중이었다.

명량대첩은 이미 빼앗긴 제해권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정유재란)을 끝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전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서양 중심의 역사에 기록된 소위 세계 4대 해전이나 그 밖의 세계해전사에서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위대한 승리다.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진도 울돌목의 물의 흐름과 지형지물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판단 이용하여 승리를 이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은 민관군이 하나 되어 만든 기적의 역사다.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각오로 전장의 선두에 서서 솔선수범하는 지휘관과 군사들의 드높은 사기는 임진왜란을 종식하는 결정적인 전투 명량대첩의 신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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