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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2)

by 도생(道生) 2016. 11. 22.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申仁善) - (2)

 

 

 

 

 

 

 

 

 

 

 

 

 

 

 

 

율곡 이이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에서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한 신화 같은 이야기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의 주인공이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1501~1561)는 50세에 이르러 음서(蔭舒)로 관직에 나갔다.

남다르게 총명했던 율곡 이이와 현명한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의 가르침 아래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율곡 이이의 성장기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라고 해도 부모님 또는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그 영재의 천재성은 묻힐 수도 있다.

 

 

 

 

 

 

 

 

 

 

 

 

 

 

율곡 이이의 총명함과 천재성은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조선 시대 과거에서 그 빛을 발한다.

13세에서 29세까지 소과(생원과, 진사과)와 대과, 별시 등에서 모두 9차례 급제를 한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조선왕조 국가 고시를 아홉 번이나 급제한 인물이란 의미다.

 

 

 

율곡 이이는 왜? 굳이 과거를 아홉번이나 치렀을까?

자신의 총명함과 천재성을 뽐내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학문적 성찰과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과거를 계속 본 것일까?

아니면 때를 기다린 것일까?

 

 

율곡 이이 본인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9번이 과거 급제에서 분명한 것은 굳이 안 봐도 되는 과거까지 보았다는 점이다.

 

 

율곡 이이는 13살이 되던 1548년(명종 3) 처음 과거를 보았고 진사시(進士試, 초시)에 합격했다.

1564년(명종 19) 8월에 아홉 번째 과거 식년시(式年試, 초시 복시 전시)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간다.

 

 

 

 

명종은 1545년에서 1567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22년의 재위 중 20년 동안은 문정왕후(1501~1565)와 소윤의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전횡하던 시기다.

1565년 4월에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윤원형과 정난정 등 권력을 전횡했던 인사들이 죽으면서 혼란했던 조정은 안정을 찾는다.

 

 

 

 

 

 

 

 

 

 

 

 

 

 

율곡 이이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요인 중에 가정사도 영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의 조정 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없다.

 

 

16살이 되던 1551년(명종 6)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경기도 파주에서 시묘살이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가에 귀의하여 1년간 승려생활을 하였다. 이때 공부한 불교와 도교 사상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으로 심적인 방황과 더 큰 공부를 위해 승려를 했던 이력은 자신과 사상이 사림(선비)에 의해 공격받는 빌미가 되었다. 22살이 되던 1577년(명종 12) 성주 목사 노성린의 딸 곡산 노씨와 혼례를 올린다.

 

23살의 율곡 이이는 58살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문제 등 서로의 사상을 갖고 사흘 동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퇴계 이황은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율곡 이이가 26살이 되던 1561년(명종 16)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이원수마저 돌아가셨다.   

3년 상을 마친 율곡 이이는 29살이 되던 1564년(명종 19)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한다.

 

 

1572년(선조 5)부터 1581년(선조 14)까지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관직에 나가기를 몇 차례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후학을 양성하고 성학집요, 격몽요결, 기자실기 등을 저술하였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사림(선비)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완화하고 서로 화합시키기 위해 동인과 서인 양쪽 모두 옳고 그를 수 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전개하면서, 동인과 서인을 통합하는 조제론(調劑)을 주장하자 동인이 율곡 이이를 비판한다.

 

 

 

1581년(선조 14) 사헌부 대사헌, 1582년(선조 15) 이조판서,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로 있다가,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난다.

 

1584년(선조 17) 율곡 이이는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율곡 이이는 목숨을 내놓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조선의 각종 병폐를 개혁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직언하였다.

 

율곡 이이는 1574년(선조 7) 만언봉사(萬言奉事), 1582년(선조 15) 진시폐소(陳時弊疏), 1583년(선조 16) 6조계(六條啓, 시무 6조) 등 조선 개국 이래 200년 동안 누적되어온 조선의 적폐(積弊),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청산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추진했던 개혁 정치, 즉 경장(更張)은 우유부단한 선조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무산되고 만다.

 

 

율곡 이이의 사상과 철학은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기, 윤증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형성한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소과(생원과 진사과)의 초시와 복시, 대과의 초시와 복시와 전시 총 다섯 단계다.

소과(小科, 생원과와 진사과의 초시 복시), 대과(大科, 초시 복시 전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式年試)다.

별시(別試, 초시 복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가 필요한 때 실시하는 과거 제도다. 

 

 

율곡 이이의 아홉 번 과거 급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경력

 

1548년(명종 3) 13세 소과(진사시 초시) 급제

1556년(명종 11) 21세 소과 (진사시 복시) 급제

1558년(명종 13) 23세 별시(초시) 급제

1564년(명종 19) 29세 생원시(명경과 초시와 복시) 급제, 진사시(초시) 급제, 대과(초시, 복시, 진시)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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