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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조선왕조실록)

by 도생(道生) 2016. 11. 23.

진실일까? 거짓일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통해 본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 진위(眞僞) 논쟁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 수많은 사건과 인물이 있다.

5백 년 조선왕조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관(史官)이 일종의 논평 같은 주관적인 견해를 적은 의견으로 사론(史論)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론(사필史筆)은 특별한 서술방식으로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가치 중에 하나다.

때론 임금과 신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필(사론)은 두려움이 대상이기도 했다.

 

사론은 사건과 인물에 대해 사실에 근거하여 논평을 쓴 예도 있겠지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여론이 아닌 집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한계도 있다.

 

 

 

 

 

 

 

 

 

 

 

 

 

 

 

 

율곡 이이는 명종 재위 말기에 조정에 출사하여 선조 재위 중기까지 벼슬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는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설 내용이 없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는 율곡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나온다.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에는 특정 인물과 사건이 상반되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 5백 년에서 훈구, 사림, 외척 등의 특정세력과 사림의 분열로 형성된 붕당정치는 아주 작은 것을 크게 부풀리기도 하고, 때론 없는 사실을 조작해 만들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상대세력을 제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실록을 편찬할 때 국정(國政)을 주도하고 있는 특정 세력에 의해 사론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조 말에서 광해군 재위 때는 정인홍 등의 북인이 집권했고, 인조반정으로 송시열 등의 서인이 집권했다.

(선조 때 동인은 온건파(남인)와 강경파(북인)로 분열, 서인은 효종 때 노론(송시열)과 소론(윤증)으로 분열)

 

 

 

 

 

 

 

 

 

 

 

 

 

 

 

 

먼저 선조실록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잘못 쓰였다기보다는 실록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가 7년의 임진왜란 기간에 사라져 내용이 부실하다.

선조가 즉위한 1567년부터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26년간의 기록이 소실되었다.

야사(野史)에는 사관이 도망가면서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조가 즉위한 1623년 선조실록의 문제점이 제기되었고,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은 1643년(인조 21)에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되어 1657년(효종 8년)에 완료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율곡 이이의 저서에는 십만양병설이 나오지 않는다.

인조와 효종 때 작업하여 편찬된 선조수정실록 사관의 논평인 사론에 십만양병설이 유일하게 나온다.

 

 

 

선조수정실록 16권, 선조 15년 9월 1일(1582년)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미리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앞으로 뜻하지 않은 변란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류성룡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단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매우 강력히 변론하였다.

 

 

병조판서(現 국방부 장관) 율곡 이이(1536~1584)가 혹시 닥칠지 모르는 전란을 대비하기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는데 나이도 어리고 직위도 낮은 류성룡(1542~1607)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십만양병설이 무산되었다는 느낌이 들며, 이는 마치 임진왜란의 책임이 류성룡에게 있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율곡 이이는 1584년 세상을 떠났고, 율곡의 제자 김장생은 스승에 대한 일을 기록한 율곡행장栗谷行을 1597년(선조 30)에 썼다.

 

 

율곡행장'일찍이 경연에서 청하기를 군병 10만을 미리 길러 완급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지나지 않아 장차 토붕와해(土崩瓦解,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무너져 버림)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정승 류성룡이 말하기를 '사변이 없는데도 군병을 기르는 것은 화근을 기르는 것입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 사관이 기록한 십만양병설은 바로 김장생의 「율곡행장」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며, 이정구의 율곡시장, 이항복 율곡신도비명마찬가지다.

 

 

 

김장생의 제자 우암 송시열은 율곡연보에서 십만양병설의 때를 1583년(선조 16) 4월이라고 특정했다.

송시열은 곡연보에 율곡 이이가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라고 선조에게 건의했다고 주장했다.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주장 년도(年度)가 각기 다르다.

선조수정실록1582년(선조 15) 9월에 '일찍이(예전에)'라고 사관이 기록했고, 

우암 송시열의 율곡연보1583년(선조 16) 4월이라고 주장했다.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1583년 2월 선조에게 이른바 시무육조(6조계) 상소를 올렸다.

조선 국방의 책임자로 임금에게 국방력 강화를 위한 개혁 요청이었다.

십만양병설은 6조계 상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나오지 않는다.

 

 

 

상소는 여섯 가지 내용으로 어질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는 현능(賢能), 군사와 백성을 양성하는 군민(軍民), 재용(財用), 병영을 튼튼히 하는 번병(藩屛), 전마(戰)를 기르고,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등의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7권, 선조 16년 2월 15일(1583년) 中

"군민(軍民)을 기른다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양병(養兵)은 양민(養民)이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양민을 하지 않고서 양병을 하였다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율곡 이이가 주장했다는 십만양병설의 결론 없는 진위(眞僞)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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