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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율곡 이이와 이순신장군과 백사(오성) 이항복

by 도생(道生) 2016. 11. 24.

율곡 이이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

 

 

 

 

 

 

 

 

 

 

 

 

 

 

 

율곡 이이(1536~1584)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덕수 이씨이며, 오성대감으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1556~1618)은 경주 이씨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과거에서 아홉 번 급제한 신화의 주인공 율곡 이이는 명종 19년(1564)에 관직에 나갔고, 이조판서(정 2품)직을 마지막으로 선조 17년(1584) 세상을 떠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선조 31년(1598) 삼도수군통제사(종 2품)로 임진왜란 끝자락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은 선조 13년(158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선조 33년(1600)에 영의정에 올랐고, 오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년(1618)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 함경도 북청에 귀양갔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은 1574년(선조 7) 19세행주대첩의 영웅 권율 장군의 사위가 된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 이항복의 비범함을 보고 손주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조선 14대 왕 선조대왕 이연은 1567년부터 1608년까지 42년간 재위에 있었다.

선대왕 명종과 후대왕 광해군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 선조가 재위하던 기간 동안 관직에 함께 있던 시기는 율곡 이이는 선조 1년에서 13년까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선조 9년에서 31년까지,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은 선조 13년에서 선조 42년까지다.

 

 

 

 

율곡 이이와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은 문관이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주로 변방에서 근무한 무관이다.

율곡 이이와 이순신 장군이 관직에 함께 있던 기간은 불과 5년이며, 오성대감 이항복이 조정에 출사하던 해에 율곡 이이는 세상을 떠났다.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의 공통점은 한양(서울)에 연고가 있다는 것이다.

율곡 이이와 이순신 장군은 같은 덕수 이씨로 이순신 장군이 율곡 이이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19촌 숙질간이다.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한양에서 유명한 영재였다.

 

 

 

 

 

 

 

 

 

 

 

 

 

 

 

율곡 이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의 일화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現 학국학중앙연구원)이 1980년부터 1988년까지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와 1979년부터 1991년까지 간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래의 두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된 내용이며 야사(野史)에 기록된 이야기다.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에게 "섧지(슬프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수건)가다."라는 이상한 말을 남겼다.

 

 

아무 대비책 없던 조선은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선조는 누구보다 먼저 도망갔다.

결국,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되었고,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이 이여송과 4만 명의 명나라 원군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다.

 

국난의 위기에 명나라 원군을 청한 터라 기쁘거나 즐거운 마음이 들리 없었다.

그러나 접빈사가 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으로서는 감사하고 기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아야 했다.

 

이때 불현듯 율곡 이이의 말이 떠올라 고춧가루를 수건으로 싸서 눈을 비비자 매운 고춧가루 때문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를 본 이여송과 명나라 군대는 접빈사로 나온 백사 이항복이 너무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별로 싸울의사가 없던 이여송과 명나라 군사는 큰 감동을 한다.

(정신문화연구원 1980년 『한국구전문학대계』 中)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덕수 이씨이며 19촌 숙질간으로 이순신 장군이 나이가 어리지만, 항렬이 높다.

 

율곡 이이는 이순신 장군을 만났을 때 '두보의 시를 천 번 읽으라.'고 하였다 한다.

이는 '독룡잠처수편청(毒龍潛處水偏淸, 독룡잠처수변청毒龍潛處水便靑: 독룡이 숨어 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의 구절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98년(선조 31) 일본 수군과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였고, 수많은 해전에서 가장 극적인 승리를 만든 전투가 명량대첩이다. 그래서 '독룡잠처수변청'에 영감을 얻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고도 전하기도 한다.

 

 

 

율곡 이이는 이순신 장군에게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가 높이 난다.)'의 구절도 잊지 말라 하였는데,

이 말을 깊이 새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의 여러 차례 해상 전투에서 학익진 등 대진(對陳)에 사용하여 모두 승전하였다고 한다.

(정신문화연구원 1991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中)

 

 

 

 

 

율곡 이이가 이순신 장군에게 전하였다는 이야기는 다른 한쪽에서는 구봉 송익필이 이순신 장군에게 전해준 이야기라고도 한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은 당시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고의 지성이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의 사상과 철학, 우정 등겨 있으며 세 사람이 35년간 주고받은 편지가 후대에 삼현수간(三賢手簡)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현재 보물 1415호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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