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 허난설헌

by 도생(道生) 2016. 11. 28.

조선 시대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

 

 

 

 

 

 

 

 

 

 

 

 

 

 

 

16세기 조선 시대 강원도 강릉출신 4명의 남녀가 각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신사임당 신인선(1504~1551)과 율곡 이이(1537~1584) 모자(母子)와 교산 허균(1569~1618)과 허난설헌 허초희(1563~1589) 남매(男妹)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남성은 학자와 정치가였으며, 두 여성은 화가와 문인이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은 동인의 영수였으며, 20살 아래인 율곡 이이(1537~1584)는인이다.

 

 

 

 

 

 

허엽은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고 허균과 허난설헌은 셋째 아들과 셋째 딸이다.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 외에도 허씨 집안에서 이름을 알려진 형제가 더 있다.

 

 

허엽의 첫째 부인 청주 한씨로 아버지는 한숙창, 조부는 한익, 증조부는 한치례, 고조부가 한확이다.

한확의 딸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학문적 식견이 높았다고 평가되는 인수대비 한씨다.

 

허엽의 둘째 부인 강릉 김씨의 아버지는 김광철(예조참판), 조부는 김세훈(종부시첨정). 증조부는 김대(사간원헌남), 고조부는 김필양이다.

 

 

 

 

 

 

 

 

 

 

 

 

 

 

허엽과 첫째 부인 청주 한씨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으나 사별하였다

아들 허성(許誠), 큰사위 박순원, 둘째 사위는 우성전(남인의 영수)이다.

 

 

 

허엽은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강릉 김씨와 재혼했다.

허엽은 강릉 김씨와 사이에서 둘째 아들 허봉, 셋째 딸 허초희(허난설헌), 셋째 아들 허균을 낳는다.

 

 

 

허엽의 큰아들 허성(1548~1612)은 21살과 35살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갔다 오기도 했고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허엽의 둘째 아들 허봉(1551~1588)은 22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아버지와 함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율곡 이이의 과실을 탄핵하다 한때 유배되기도 했다.

관직을 그만두고 산천을 유랑하던 중 사망한다.

 

 

 

허엽의 셋째 아들 허균(1569~1618)은 17살, 21살, 26살, 29살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동인의 영수 김효원의 딸과 재혼했다.

불교를 숭배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등의 이유로 관직에서 파직됐다가 복직된다.

계축옥사에 연류되어 큰 화를 당할 뻔했으나 위기를 모면하였다.

 

허균은 인목대비를 폐위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섰고, 폐모(廢母)에 반대한 영의정 기자헌은 귀양을 가게 된다.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은 광해군에게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비밀 상소를  올렸으나 광해군은 역모의 진상을 조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1618년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 정 아무개가 온다...'는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하자, 광해군은 지난날 기준격의 비밀 상소를 다시 조사하게 하고 허균은 역모를 부인하였으나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했다.

 

 

 

 

비운의 천재 남매 허엽의 셋째 딸 허난설헌 동생 허균은 허봉의 친구였던 손곡 이달에게 글을 배웠다.

손곡 이달은 서자 출신이라 관직에 나갈 수 없었지만, 당대에 명망 높 한시(漢詩)의 대가다.

 

허엽의 셋째 딸 허난설헌(1563~1589)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하였고, 남편의 외도와 시어머니와의 불화 속에 살았다.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어려서 잃었고, 아버지(1580년)와 오빠(1588년)의 죽음 끝에 1589년 27살에 갑자기 요절했다.

 

 

 

 

 

 

 

 

 

 

 

 

 

 

 

허균은 누나가 27살에 요절하자 누나 허난설헌의 글을 모아 난설헌집을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1602년(선조 35)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누나 허난설헌의 지은 글을 보여줬고, 1608년 명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누나 허난설헌의 작품을 가져갔다.

 

 

 

 

1608년 허난설헌의 작품을 수록한 난설헌집은 명나라에서 먼저 나왔다. 

1612문인 반지항(1556~1622)의 문집긍사(亘史)에는 168편의 시가 들어 있고 긍사 취사원창(聚沙元倡)에 허난설헌의 시(詩)가 들어 있다.

 

1652년 청나라 전겸익이 펴낸 열조시집, 주이존이 펴낸 명시종 등에도 허난설헌의 글이 실려 있다.

1711년 일본 분다이야 지로에 의해 책으로 발간된다.

 

 

조선, 명·청나라, 일본에서 극찬과 함께 표절의혹이 일었 허난설헌의 작품에 대한 표절 논란현재 진행형이다.

조선 시대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을 비롯하여 아버지 허엽, 허성, 허봉을 '허씨 5문장가'라 부른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14권, 선조 13년 2월 1일(1580년)

 

허엽이 이황과 더불어 학문을 논의할 적에 고집스럽고 구차한 논란을 많이 하자, 이황이 말하기를 '태휘(太輝)가 학문을 하지 않더라면 참으로 선인이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경훈(經訓)을 독실히 좋아하여 늘도록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 이점에 대해 훌륭하게 여겼다.

·서 당이 갈라진 뒤로 허엽이 동인의 종주(宗主)가 되어 의논이 가장 엄격했다.

 

박순과는 동문수학한 친한 벗이었는데 만년에는 색목이 달랐기 때문에 공박하는 일에 서슴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묘지(卯地)라고 일컬었는데 묘(卯)는 정동(正東)이 되기 때문이다.

 

세 아들인 성(筬), 봉(), 균(筠)과 사위인 우성전(禹性傳), 김성립(金誠立)은 모두 문사로 조정에 올라 논의하여 서로의 수준을 높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컫기를 '허씨(許氏)가 당파의 가문 중에 가장 치성하다.'고 하였다.

 

 

 

 

 

태휘(太輝): 허엽의 자(字), 호(號)는 초당

박순: 허엽과 함께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서인의 영수

 

 

허성(許): 허엽과 첫째 부인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허봉(許): 허엽과 둘째 부인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허균(許筠): 허엽과 둘째 부인 강릉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 홍길동전의 저자

 

 

우성전: 남인의 영수, 허엽과 첫째 부인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의 남편

김성립: 허난설헌의 남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전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