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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대마도정벌과 4군 개척의 명장 최윤덕 장군

by 도생(道生) 2016. 12. 3.

무인(武人)으로 정승에 오른 명장(名)

대마도정벌과 압록강 4군 개척의 명장으로 정승에 오른 좌의정 최윤덕 장군

 

 

 

 

 

 

 

 

 

 

 

 

 

 

 

 

 

조선 초기 명장 임곡 최윤덕 장군은 무인으로 시작하여 세종대왕 재위 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혹자는 최윤덕 장군이 무장으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또, 최윤덕 장군이 영의정을 지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개성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죽인 조영무가 무장으로서 가장 먼저 정승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조영무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영의정은 황희정승이었다.

 

 

 

 

임곡 최윤덕 장군(1376~1445)은 1376년(고려 우왕 2) 경상도 창원 북면에서 최운해(1347~1404)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최운해는 무장으로 고려와 조선에서 공신의 첩지를 받았고, 참판충추부사를 지냈으며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명장(名將)이다.

 

임곡 최윤덕 장군은 1394년(태조 3) 무과 초시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조정의 명으로 음직으로 관직에 나갔다.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4월 10일(1402년)

최윤덕은 이미 회시(會試,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아버지 최운해를 따라가 이성(泥城)을 수비하라고 명하였던 까닭에, 전시(殿試)에 응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를 방()의 끝에 넣게 하였다.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2월 5일(1445년)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전보되어, 병자년에 아버지를 따라 영해의 반포에서 왜적을 쳐서 연이어 죽였다.

 

 

 

 

명장 최윤덕 장군의 아버지 최운해는 1404년(태종 4)에 세상을 떠났다.

 

훈련관 부사, 지태안군사, 대호군 등을 지내다가 1410년(태종 10) 무과에 급제하였고 동북면 조전 병마사, 경성병마사로 제수된다. 1411년(태종 11) 호용 시위사 총제, 우군 동지총제, 경성 등처 도병마사가 된다.

중군 절제사, 우군 총제, 좌군 총제, 도진무 등 무장으로서 많은 관직을 거쳤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4월 8일(1419년)

최윤덕을 의정부 참찬의 관직을 제수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5월 20일(1419년)

상왕(태종)이 영의정 유정현을 산도 도통사로,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로 삼았다.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5월 21일(1419년)

도절제사 최윤덕이 떠날 때에, 상왕(태종)이 활과 화살을 주었다.

 

 

 

 

 

대마도정벌은 세종대왕 재위 시에 일어났지만, 상왕 태종이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태종이 최윤덕 장군에게 활과 화살을 주었다는 것은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다.

상왕 태종 이방원은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 최윤덕 장군을 삼군 도절제사로 임명했다.

 

 

 

대마도정벌의 총책임자(사령관)는 개국공신 장천군(長川君) 이종무 장군(1360~1425)이다.

227척의 병선과 1만 7천여 명의 병사가 대마도를 공격하였다.

대마도 전체를 정벌하지는 못했으나 큰 타격을 주었고 대마도는 조선에 예속된다.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7월 17일(1419년)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1421년(세종 3) 공조판서, 142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428년 병조판서가 된다.

1433년(세종 10) 평안도 도절제사, 1433년(세종 15)에 야인족 이민주의 침입을 막고 정벌한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 된다.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에서 군사 1만 5천여 명을 동원하여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자성군을 설치하여 4군 개척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압록강변의 무창, 자성, 우예, 여연의 4군은 고려말부터 야인과 잦은 충돌이 있었던 지역이다.

 

여연군은 1416년(태종 16)에 설치되었고, 이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여진족 본거지 오라선성을 토벌했으며, 1440년(세종 22) 무창현, 1443(세종 25)년 우예군이 설치되면서 4군이 완성된다.

 

 

 

 

 

명장 최윤덕 장군은 무장으로 변방과 왜를 정벌하고, 북방의 혼란을 평정하는 등 무장으로서 혁혁한 공도 세워웠지만, 덕(덕)도 갖추어 정승의 자리까지 올랐다. 

 

 

1436년(세종 18) 변방의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세종은 최윤덕 장군의 실책을 용서한다.

대마도정벌과 4군 개척의 명장 최윤덕 장군은 정치하는 조정이 아닌 변방의 일선에서 무장으로서 일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세종대왕에게 요청하였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대마도정벌과 4군 개척의 명장이며 무장(武將)으로서 정승의 반열에 오른 임곡 최윤덕 장군은 1445년(세종 27) 70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5월 16일(1433년)

최윤덕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고, 권진을 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임금이 제수할 때를 당하여 (김)종서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경은 거년의 말을 기억하는가. 경과 더불어 일찍이 말하기를, ‘윤덕이 가히 수상(首相, 영의정)이 될 만하다. ’라고 하였는데,

수상은 그 임무가 지극히 중하므로 전공(戰功)으로 그 벼슬을 줄 수 없다. 지금 윤덕이 비록 전공이 있다 할지라도 덕이 없으면 단연코 제수할 수 없다. 내가 전후에 사람을 취하고 버리는 것이 이와 같으니, 경은 거년에 말한 바와 오늘의 의논한 바를 가지고 다시 여러 대신들과 잘 의논하여 보고하라."하매,

 

 

(김)종서가 나와서 맹사성 등과 논의하니, 모두 말하기를,

"윤덕은 공평하고 청렴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조심하여 봉공(奉公)하는 사람이니, 비록 수상(영의정)을 삼을지라도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이와 같았는데 대신의 뜻도 이와 같으니 권진의 벼슬을 대신하게 하라.

내가 작은 벼슬을 제수할 적에도 반드시 마음을 기울여서 고르는데 하물며 정승이리오.

윤덕은 비록 배우지 않아서 건백(建白)의 일에 어두우나,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일심봉공(一心奉公)하여 족히 그 지위를 보전할 것이다. 그리고 숙치(叔畤)는 평안도 감사로서 북정(北征)할 때에 군사 조발(調發)과 군량 운수를 잘하였기 때문에 품계를 올려 제수한 것이다."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2월 1일(1435년)

 최윤덕(崔閏德)은 좌의정의 관직을 제수받는다

 

 

 

 

세종실록 74권, 세종 18년 7월 4일(1436년)

정부의 대신과 사헌부에서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특별히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라는 벼슬자리를 만들어서 그에게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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