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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후금(청나라) 조선침략, 정묘호란 병자호란

by 도생(道生) 2016. 12. 10.

한양 도성(都城)3번씩이나 버리고 도망간 인조의 굴욕과 치욕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3번씩이나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간 임금은 조선 16대 왕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가 유일하다. 인조는 내란(內亂) 이괄의 난과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과 병자호란(1636년, 인조 14~15)의 외침(外侵) 때 도주했다.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명나라와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야만 후금(청나라)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보위에 오른 인조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西人)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의 외교정책을 고수한다.

 

 

 

광해군이 국정운영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비롯하여 많은 실정이 인조반정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국가와 백성을 위한 광해군의 중립적인 실용주의 외교정책까지 반정 세력의 대명일월(大明日月, 숭명崇明)사상으로 말미암아 폐기됐다. 

  

 

대명사대(大明事大)의 명분으로 외교정책을 고수하던 조선은 후금(청나라)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사대주의 조정 신료들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리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한낱 오랑캐로 여기던 청나라에 굴욕과 치욕을 당하게 된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발생하면서 인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로 도망갔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 이괄은 북방의 수비 병력 상당수를 반란군으로 만들어 한양 도성을 향해 남하했고,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며 내려와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20일도 안 돼 한양을 점령했다.

 

 

 

 

이괄의 난은 자중지란이 일어나 이괄과 핵심 주동자가 죽으면서 끝났다.

이괄의 난에 참여한 서북지역 병력은 3만 명에서 1만 명으로 감소한 상태였지만, 조정은 북방의 전력은 고려하지 않고 한양 도성과 경기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군을 확대한다.

 

 

 

 

명청전쟁(명나라와 후금), 1618~1644)의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북방 경비를 강화하지 않았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책임진 임금과 조정 신료들의 잘못된 정책과 아무 대비책 없는 북방 경비는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부른다.

 

 

 

 

 

 

 

 

 

 

 

 

 

 

인조를 위한 변명을 한다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재위 초기 광해군 실정(失政)의 후유증과 이괄의 난, 그리고 작은 역모 사건이 빈발하였고, 반정을 주도한 서인(西人) 세력의 권력은 비대해져 가고 있었다.

 

 

 

 

 

하늘이 안 도와주는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인지, 임금다운 자질이 부족해서인지, 권력에 눈먼 위정자들 때문인지 인조는 개인적으로도 가장 불행한 임금 중 한 명이 된다.

 

 

인조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첫 번째로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두 번째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번째로 도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결국에는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여진족(청나라)에게 무릎 꿇고 조선 백성 50만 명이 청나라로 끌려가게 하였다.

 

 

 

 

후금(청나라)이 침략한 정묘호란 전쟁에서 조선은 패하고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족(후금, 청나라)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대명 사대(大明事大)주의자들은 그들이 야만족이라 무시했던 오랑캐(후금, 청나라) 부족이 두 번째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다.

인조는 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 가장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임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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