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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대명사대주의가 자초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by 도생(道生) 2016. 12. 11.

대명(大明)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자초한 국란

동아시아의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의 조선 침략전쟁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1616년(광해군 8) 여진족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후금(後金, 청나라)을 세웠다.

후금(後金)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던 1636년(인조 14) 청나라로 나라이름을 바꿨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난을 일으킨지 한 달도 못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로 후금(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인 정묘호란(1627년, 인조 5)이 일어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618년(광해군 10)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공격하면서 명청전쟁(1618~1644)이 시작됐다.

광해군은 비록 쇠퇴하고 있었지만 강대국인 명나라와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실용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인조와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배금친명(排金親明)을 주장했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대명 사대주의에 입각해서 후금(청나라)에 적대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명청전쟁이 한창진행 중에 후금(청나라)은 조선과 경제교류가 단절되었고, 앞쪽에는 명나라와 뒷쪽에는 조선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괄의 난에 참여했다가 후금(청나라)으로 도망간 한윤은 광해군의 명으로 후금(청나라)에 거짓 투항했던 강홍립에게 '강씨 일족이 모두 죽었다.'라고 말한다.

한윤은 인조가 부당하게 보위에 올랐고, 조정이 불안정하니 조선을 침략하라고 후금(청나라) 황제를 부추겼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명으로 도원수가 되어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의 전쟁에 참여했고, 광해군의 명으로 후금에 거짓 투항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권력에 취한 조정 신료들의 머리속에서 강홍립은 반역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후금(청나라)은 초대 황제 천명제(청태조 누르하치, 1559~1626)가 죽고 두 번째 황제 숭덕제(청태종, 1592~1643)가 즉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8일 후금(청나라) 황제 태종은 조선 침략을 명하였고, 3만 명이 넘는 병력은 순식간에 압록강을 넘어 조선 강토를 유린했다. 이때 강홍립은 후금의 군대와 함께 조선에 들어온다.

 

 

 

 

이괄의 난 이후 북방의 군대는 약화되어 있었고, 이미 한 번의 반란을 겪은 조정은 군사 훈련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후금(청나라) 군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남하한다.

 

 

오합지졸에 가까운 조선군은 3만 여명의 후금(청나라) 군대에 연전연패하였다.

오랑캐 여진족의 외침(外侵)에 임진왜란 때처럼 의병의 활약도 없었다. 지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동하다 역적이 되어 죽는 모습을 본 백성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후금(청나라) 군대는 보름도 안되 평양을 점령한다.

 

 

 

조선을 침략한 후금(청나라) 군대는 명나라와 전쟁중이라 조선과의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황해도 평산까지 내려온 후금(청나라) 군대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조선과 협상을 벌인다.

 

 

 

 

 

 

 

 

 

 

 

 

 

 

1627년(인조 5) 1월 27일 인조는 이괄의 난에 이어 두 번째로 한양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간다.

조선과 후금(청나라)는 줄다리기 끝에 1627년(인조 5) 3월 3일 조선과 후금(청나라)은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는다.

 

강홍립은 정묘화약이 체결되기까지 통역을 맡았다.

후금 군대 철수 등 다섯 가지 사항의 약조를 맺었지만, 가장 핵심은 후금(청나라)와 형제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후금(청나라) 군대는 철수하였고, 강홍립은 조선에 남게 된다.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조선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오랑캐 여진족과 화약을 맺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국가와 백성의 안위는 뒷전이고 누구하나 책임지는 자도 없었다.

그러다 정묘호란의 책임을 강홍립에게 뒤집어 씌다.

 

조정 신료들은 인조에게 강홍립을 참수하라고 빗발치듯 요구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강홍립의 참수를 끝내 거부했고, 그해 7월 강홍립(1560~1627)은 병사했다.

 

 

 

 

 

광해군은 무리한 국정운영,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를 일삼는 간신배들이 조정과 지방에서 판치는 등 실정이 많았다.

그러나 북방의 강대국 명나라와 신흥 강대국 후금(청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외교를 하였다.

 

반면,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와 반정을 주도한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워 후금을 배척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25일(1627년)

 

"강홍립과 박난영 등이 오랑캐에게 잡혀간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끝까지 머리를 깍지 아니하였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마땅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여 그의 성의를 나타내 주어야겠으니 대신에게 물으라."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3월 3일(1627년)

 

"조선 국왕은 지금 정묘년 모월 모일에 금국(金國)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하고 잗단 일로 다투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요구하지 않기로 한다.

 

만약 우리 나라가 금국을 적대시하여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며, 만약 금국이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화친을 위배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역시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니, 두 나라 군신은 각각 신의를 지켜 함께 태평을 누리도록 할 것이다. 천지 산천의 신명은 이 맹약을 살펴 들으소서."....

 

 

"조선 국왕은 지금 대금국 이왕자와 맹약을 한다. 두 나라가 이미 아름다운 화친을 맺었으니, 이후로는 마음과 뜻을 함께 하여야 한다. 만약 조선이 금국을 적대시하여 병마(兵馬)를 정비하거나 성보(城堡)를 새로 세워 불선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앙화를 내릴 것이며 이왕자도 만일 불량한 마음을 갖는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릴 것이다. 만약 양국의 두 왕이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여 공도로써 처신한다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많은 복을 누릴 것이다."

 

 

 

 

 

『인조실록』 16권, 인조 5년 7월 27일 1627년

 

강홍립(姜弘立)이 병사하였다.

상이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고, 또 해조로 하여금 상사에 수요되는 물품을 제급하게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건대 강홍립은 사직에 제사를 올린 뒤 명을 받고 국경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기쁜 마음으로 오랑캐에게 항복하였는가 하면 적을 이끌고 나라를 침범하여 임금이 되려는 뜻을 가졌으니 죄가 역적 예(豫)보다 지나치고 악이 역적 윤(潤)보다 심하여 실로 천하의 난적(亂賊) 중에 심한 자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법이 없고 정론이 행해지지 않아 주벌이 가해지지 않은 채 제 집에서 죽었으니 신명과 사람의 통분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상사에 부의(賻儀)까지 한다면 어떻게 신하들에게 충성을 권장하고 천하의 악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감히 분부를 받들 수 없으므로 죄를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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