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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오랑캐 청나라의 조선침공 병자호란

by 도생(道生) 2016. 12. 12.

후금(後金, 청나라)을 여진족 오랑캐로 멸시하여 자초한 병자호란

청나라의 조선 침공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 조선 16대 왕 인조

 

 

 

 

 

 

 

 

 

 

 

 

 

 

 

후금(여진족, 청나라)은 북방의 여러 부족과 내몽골을 정복하고 2대 황제 숭덕제(홍타이지)가 1636년(인조 14) 국호를 후금에서 청나라로 고쳤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 사대주의자들이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긴 청나라(후금)는 명실공히 제국의 위상을 갖추고, 1627년(인조 2) 정묘호란에 이어 조선을 재침공한다. 바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대명 사대주의자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조선 조정은 후금을 여진족 오랑캐 이상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후금(청나라) 사신을 푸대접하는 등 철저하게 무시하는 등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정책을 그대로 고수하였다.

 

 

정묘화약으로 조선은 후금(여진족, 청나라)에 세폐(공물) 등을 바치고 있었는데, 후금(여진족, 청나라)이 명나라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은 물자가 필요했다. 군사와 군마, 황금 등을 요구하는 한편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대명사대(大明事大)하는 조선으로서는 여진족 오랑캐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를 할 수도 없었고, 군사 3만 명, 말 3천 필, 황금 백만 냥 등의 요구조건은 조선이 감당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청나라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 한족(漢族)은 예로부터 이민족과 자신들이 사는 중원을 제외하고 동서남북의 여러 민족과 국가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다.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 천제지자天帝之子)가 있는 중원 이외의 지역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여 모두 벌레와 짐승 같은 야만스런 오랑캐로 여겼다.

 

조선의 대명 사대주의자들은 중국 한족(漢族)의 명나라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애신각라)는 명나라와 본격적인 전쟁을 하기 전 후방에서 공격할지도 모르는 조선을 확실하게 해둘 필요도 있었다.

 

인조의 정비 인열왕후 장례식과 기타 여러 가지 사항을 전달하러 온 청나라 사신을 조선 조정은 대놓고 무시하고 인조는 사신이 들고온 국서도 거부하였다. 이상한 동태를 느낀 청나라 사신은 다급하게 청나라로 돌아가던 길에 인조가 평안도 관찰사에게 보낸 밀서를 탈취한다.

 

 

1627년(인조 2) 정묘호란 때는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지만,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애신각라)가 직접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일(1637년)

 

"대청국의 관온 인성 황제는 조선의 관리와 백성에게 고유한다.

짐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와 군신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우리 사신이 왕(인조)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를 마침내 못 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따라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을 다하게 하라.'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이후 군대를 재편하긴 했지만, 청나라는 9년 전의 후금(여진족)이 아니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2일 청태종 홍타이지가 여진족(청나라 군사)과 몽골족, 한족 등 10여 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12월 8일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자 도원수 김자점과 의주 부윤 임경업 장군은 청나라 대군이 조선을 침공했다는 장계를 한양으로 보냈고, 인조는 12월 12일에야 청나라의 조선침공 소식을 받았다. 청나라 군대의 진격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12월 13일 평양, 14일에는 개성까지 내려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갈 예정이었으나, 이미 청나라 선발대가 한양 외곽과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강화도로 갈 수도 없었던 인조는 다급하게 목적지를 남한산성으로 정했고, 인조는 한양 도성을 세 번째 버리고 도망간다.

 

 

12월 15일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10만 명이 넘는 청나라 대군이 남한산성을 둘러쌓으며 완전히 고립다.

 

 

 

 

 

남한산성에서 47일 버티던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융복(戎服, 군복의 일종)을 입고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린다. 인조 15년(1637) 음력 1월 30일 조선의 왕은 곤룡포가 아닌 융복을 입은 채 남한산성의 정문(지화문, 남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서문을 나와 삼전도(삼전포)로 향했다. 

 

 

 

 

 

여진족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청나라(후금) 황제에게 무릎 꿇고 땅에 머리를 박는 굴욕과 치욕을 당한다.

병자호란은 청태종 홍타이지가 심양을 출발한 지 불과 60일 만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1637년 1월 2일 쌍령전투에서는 청나라 기마병 300명이 4만 명의 조선군을 대파하면서 약 1만 명의 조선 병사가 죽었다.

 

2달 남짓한 시간에 수 만 명의 조선 병사가 목숨을 잃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 백성이 죽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50만 명 이상의 아무 죄 없는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1637년)

 

 

용골대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칙서를 받든 자는 남쪽을 향하여 서고 배신(陪臣)은 꿇어앉아 받았소이다." 하자,

용골대는 동쪽에 앉고 홍서봉 등은 서쪽에 앉았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요즈음 매우 추운데 수고스럽지 않소?"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황상께서 온전히 살려주신 덕택으로 노고를 면하게 되었소이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三田浦)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壇)을 쌓았는데, 황제가 서울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몸을 결박하고 관(棺)을 끌고 나오는 등의 허다한 절목(節目)은 지금 모두 없애겠소."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국왕께서 용포(龍袍)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용포는 착용할 수 없소."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남문(南門)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正門)을 통해 나올 수 없소." 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1637년)

 

용골대가 한(汗 칸, 청태종 홍타이지)의 말을 전하기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인조)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삼배구고두례의 의식을 소리 높여 외침)하게 하였다.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인조)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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