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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범기업의 잔혹한 만행 만인갱 대학살 사건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9. 3.

일본 전범기업의 잔혹한 만행의 역사 - 만인갱(萬人坑) 대학살 사건

 

 

 

 

 

 

 

 

 

 

 

 

 

일본 제국주의는 전시체제 이전부터 자원과 인력을 수탈했지만, 중일전쟁과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면서 무자비한 자원수탈과 인력수탈을 동시에 진행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전쟁과 전쟁범죄, 그리고 비전시(非戰時, 평상시) 체제에서 저지른 자신들이 잔혹한 만행의 역사를 철저히 부정한다. 일본군의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과 일본 전범기업이 저지른 만인갱 대학살 만행도 부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반성과 사과는 더더욱 하지 않고 있다.

 

 

 

 

 

 

 

 

 

 

 

 

해남도(하이난섬) 대학살과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은 각각 최소 30만 명 이상이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에 살해됐다.

만인갱 대학살 사건은 최소 1백만 명에서 최대 수백만 명의 중국과 한국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등을 학살한 사건이다.

 

 

해남도 대학살과 남경대학살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만행의 역사라면, 만인갱 대학살 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국영기업과 민간기업, 즉 전범기업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의 역사 현장이다.

 

 

 

 

 

 

 

 

 

 

 

 

만인갱(萬人坑)은 말 그대로 만 명이 묻힌 곳이라는 의미다.

중국 각지에서 발견된 만인갱에 따라 1만 5천 명, 1만 7천 명, 2만 명, 3만 명, 4만 명, 7만 명, 8만 명 등 만인갱 대학살 현장에서 발견된 유골의 숫자는 모두 다르다.

 

 

일본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의 현장 80여 곳의 만인갱에서 수천 구의 유골이 발견된 몇 군데 만인갱을 제외하면, 대다수 만인갱에서 발견된 유골 숫자를 합치면 희생자는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에 이른다.

 

 

 

 

 

난징대학살 당시 희생자가 묻힌 만인갱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병들고 다치고 학살된 만인갱 대학살과 중복된 경우도 있지만, 전체 만인갱에서 보면 중복된 부분은 극히 미미하다.

 

 

 

 

 

 

 

 

 

 

 

 

 

인간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준 일본 제국주의의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

http://gdlsg.tistory.com/881

 

 

 

일본 제국주의의 해남도(하이난섬) 대학살 만행과 천인갱 학살사건

http://gdlsg.tistory.com/1877

 

 

 

일본 제국주의의 해남도(하이난섬) 조선인 천인갱 학살사건

http://gdlsg.tistory.com/1878

 

 

 

 

 

 

 

 

 

 

 

 

1960년대부터 시작하여 중국 전역에서 현재까지 발굴된 만인갱은 80여 곳에 이르며 대부분이 중국의 동북 3성, 즉 만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만주 요령성(랴오닝성)에서 발견된 만인갱 대학살 현장만 34곳이 있다.

 

 

 

근대 역사에 한국인이 만주 지역으로 이주를 시작한 것은 경술국치 이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을 피하거나 항일운동을 위해 만주 이주를 시작했다.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에도 항일독립운동의 자발적 이주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이주로 만주로 이주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5년 광복 직전에 만주 동북 3성의 요령성, 흑룡강성, 길림성에 거주한 한국인은 약 23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31년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허수아비 국가 만주국은 만주의 동북 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과 내몽골 일대의 광활한 영토에 세워졌다. 만인갱은 일본 제국주의가 점령하고 있던 만주 지역의 동북 3성에서 많이 발견됐다.

 

 

 

일본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만주 일대를 개발에 착수했고, 국영과 민간의 전범기업이 앞다투어 진출했다.

 

만주 지역에서 자원과 인력을 수탈한 일본 전범기업은 일본의 국영 전범기업 남만주철도(만철滿鐵), 동양척식, 만주척식 등과 민간의 대표적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비롯한 1백 수십 개가 있다.

 

 

 

일본군과 일본 경찰의 앞세운 전범기업은 탄광과 군수기지, 공사장 등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강제동원된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석탄 탄광, 철광산, 철도, 항만, 댐 건설, 군사기지 등 인력이 필요한 곳에는 어김없이 강제동원된 중국 민간인과 한국인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강제동원된 중국인과 한국인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의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굶주림과 폭언과 폭행,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병들고 사고로 다치고 죽어갔다.

 

 

자원수탈과 인력수탈로 자신들의 배를 불린 전범기업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더 많은 인력을 강제동원했다.

 

강제노역 과정에서 사고로 죽거나 다치고 병든 사람을 구덩이에 묻어버렸고, 때론 군사시설 등의 비밀유지를 위해 중국인과 한국인을 산 채로 묻어버렸다. 만인갱 대학살 현장의 유골 중에는 두개골에 못이 박혀 있거나 쇠사슬로 묶은 유골들도 발견됐다.

 

 

 

 

 

 

 

 

 

 

 

 

만인갱이 많이 발견된 만주 동북 3성 지역은 만주에 거주한 중국인이 대다수였지만, 화북성과 사천성 지역에서 돈을 벌기 위해 온 중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 전범기업의 잔혹한 만행의 역사인 만인갱 대학살 사건은 대다수의 중국 민간인과 한국인, 그리고 전쟁포로라고 한다.

 

 

일본 제국주의 국영과 민간의 전범기업이 일본군의 비호를 받으며 자원을 수탈하는 과정에서 중국군이 공격하면서 희생된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 중 사상자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만인갱 대학살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하천, 저수지, 동굴 등과 인위적으로 구덩이를 팠거나 동굴과 폐광산 등지에서 자행됐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현장에서 먹을 것도 제대로 배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사고와 질병, 배고픔 등으로 무수히 죽어갔다.

 

 

만인갱 대학살 사건은 일본의 전범기업이 사망자와 병든 사람, 다친 사람과 탈출하다 붙잡힌 사람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육한 잔혹한 만행의 역사다.

 

 

 

일본 전범기업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의 역사 현장 만인갱 대학살에서 중국인만 희생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만인갱에서 희생된 한국인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고, 대한민국 정부는 단 한 차례도 조사조차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조사 계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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