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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주수행(신神의세계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3) 믿음의 양가성 '조신祖信'과 교신敎信'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by 도생(道生) 2014. 11. 6.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3) 믿음의 양가성 '조신祖信'과 '교신敎信'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깨침의 종교인가, 믿음의 종교인가?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는 올바른 믿음이 없이는 닦음이나 깨침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믿음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 경우를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왜 믿음의 문제가 그동안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일까?

왜냐하면 동아시아 대승불교 학자들은 "믿음이란 체계적으로 분석하거나 그에 대해 비판적 문제를 제기하거나 또는 지성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불교의 신행에서 두 가지 주요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선 불교와 정토 불교 어느 쪽에서나 믿음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두 가지 유형의 불교 신행은 믿음의 개념과 실천에서 차이가 있다. 선 불교에서 믿음이란 닦음의 자리에 굳게 서 있게 하는 확고한 신념 또는 결단의 경지이다. 반면에 정토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 큰 자비의 마음으로 세운 마흔 여덟가지 서원에 철저히, 완벽하게 의지하는 데 믿음의 본질이 있다고 보며, 바로 그런 믿음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여긴다. 그래서 흔히 선 불교의 믿음은 자력 신앙 즉 모든 것을 자기의 힘에 의지하는 신앙이고, 정토 불교에서 믿음은 타력 신앙 즉 남의 힘에 의지하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전통 모두 믿음을 구제(救濟)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는 같다."

 

 

 

 

문제는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믿음이 이처럼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동서양의 현대불교 학자들이 이 믿음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불교의 금자탑을 쌓았다고 평가되는 일본에서조차도 정토 불교의 타력 신앙 이외에는 불교의 믿음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선 불교의 자력 신앙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박성배교수는 믿음을 양가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

'조신祖信'과 교신敎信'이 바로 그것이다. '조신'이 시공의 흐름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근본적(절대적) 믿음이라면, '교신'은 시공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지말적(상대적) 믿음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조신'이 '불퇴신不退信'의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라면, '교신'은 '퇴신退信'의 '뒤로 물러설 수도 있는 믿음'이다. 이 두가지 믿음은 고려 때 지눌(1158-1218)이 이미 거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조신'은 '나는 이미 부처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믿음이고, '교신'은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조신'과 '교신'은 각기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조신'은 믿음의 주체와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주객일체적 믿음이다. 반면, '교신'은 믿음의 주체와 대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주객분립적 믿음이다.

 

예컨대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신'의 믿음은 나라는 믿음의 주체와 부처라는 믿음의 대상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나는 믿음의 주체가 되고 부처는 믿음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믿음의 주객이분법적 구조가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본래부터 부처다"라는 '조신'의 믿음은 믿음의 주체와 믿음의 대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믿음의 주체도 부처인 자기자신이고 믿음의 대상도 부처인 자기자신이다.

 

"이렇듯 주객 분별의 능소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교신과, 몸과 몸짓이 둘이 아니라는 체용의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조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신에서 부처님은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조신에서 부처님은 외부의 객체가 아니라 곧 중생의 마음, 중생의 본체, 본래의 몸이며, 믿음은 그 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몸짓이다."

 

 

 

 

 

박성배교수는 7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승려인 원효도 몸과 몸짓의 논리로 대승불교를 해석하였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원효는 승기신론의 제목을 몸과 몸짓의 구도에 적용해서 해석하였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불교철학에서 대승기신론의 제목을 어떻게 풀이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승기신론'의 제목풀이는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성배교수는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대승기신론의 주석가들은 '대승기신론'을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데 대한 논"이라는 식으로 풀이하였다고 본다. 이렇게 읽을 경우, '대승'은 '믿음을 일으킴'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런 풀이는 주객이분법의 능소 구도로 귀결되어 '교신'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된다. 이는 대승기신론은 물론이고 대승불교 핵심사상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의 제목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가?

 

 

 

박성배교수는 원효가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주객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의 틀로 삼았다고 본다.

 

 

박성배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적용하여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대승기신론'의 제목풀이를 다음과 같이 시도한다. 

 

"총괄하여 말하자면, 대승이 이 논의 궁극적인 몸(종체宗體)이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이 논의 뛰어난 몸짓이니, 논의 몸과 몸짓을 함께 거론하여 제목을 지은 까닭에 '대승기신론'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원효는 '대승'을 '믿음을 일으킴'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원효에서 '대승'은 '일심'을 가르킨다. 그리고 그 '일심'의 '대승'이 몸이 되어 믿음을 일으키는 자연스런 몸짓을 행한다. 즉 '일심'의 마음이 본체로서 몸이고,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작용으로 몸짓이 된다. 몸과 몸짓의 주객일체적 구도에 바탕을 둔 '조신'의 믿음은 외부의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일심'이라는 몸에서 일어나는 몸짓이 곧 '조신'의 믿음이다.

 

달리 말하자면, 조신은 일심의 작용이다. 일심이란 본별이 없는 무념의 마음을 말한다. 일심으로 돌아가면 중생과 부처의 구분, 깨침과 못 깨침의 분별이 없어지고 대신에 공과 연기의 세계를 직접 알게 된다. 분별을 여윈 마음에서는 퇴전이 일어날 수 없다. 분별이 없으므로 돌아갈 곳도 돌아가는 사람도 없다. 이처럼 일심의 작용인 조신은 존재론적으로 연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코 퇴전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은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란 뜻이 아니고,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대승기신'에서 '대승'은 '기신'의 목적어가 아니라 수식어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승기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조신'과 '교신' 두 가지 차원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조신'과 '교신'의 차이는 이제설(二說)로 설명할 수 있다. 이제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를 말한다. 두 가지 진리는 서로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같은 진리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상황, 즉 근기에 따라 다르게 베푸는 것이다. 즉 부처가 진리를 가르칠 때 듣는 이의 능력에 따라서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대적 진리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들의 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받아들이는 진리다." 절대적 진리란 "공이라든가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의 궁극적 진리"다. 따라서 상대적 진리는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일반 사람들의 믿음에 상응하는 것이고, 절대적 진리는 '나는 부처이다'라고 하는 깨친 사람들의 믿음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대적 진리는 깨치지 못한 사람들의 시각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절대적 진리는 깨친 사람들의 시각에 중점을 둔 것이다.

 

"다만 진제와 속제라는 두 가지 진리를 운위하는 이제설(二說)과 마찬가지로 조신과 교신이라는 두 가지 믿음도 경전에 대한 두 가지 해석 태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불퇴전의 조신과 진제는 첫 번째 범주에 해당하며, 퇴전의 교신과 속제는 두 번째 범주에 해당한다. 깨친 이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들이민 것이 조신 즉 진제이며, 그것을 방편으로 가르친 것이 교신 즉 속제이다. 그러므로 결국 교신을 인정하는 경전의 대목들은 방편의 가르침이다. 깨친 이들이 듣는 이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속제로써 가르친 것이 교신이다. 궁극적으로 교신은 진제의 장에서 불퇴전의 조신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주객이분법적 구도에 얽매여 자신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못 깨친 사람들을 위해 방편적 가르침으로 마련한 것이 '교신'의 상대적 진리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의 '조신'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승불교의 올바른 믿음, 즉 '불퇴전不退轉'의 '조신'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즉 긍정과 부정, 믿음과 회의 사이에 역동적 긴장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언제나 의심이라는 긴장의 요소가 존재한다. 특별히 그 긴장을 현저히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공안선公案腺이다.

 

 

 

 

모든 수행자는 믿음과 회의,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모든 수행자는 현실적으로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점을 의심함과 동시에 본질적으로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의 양극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 불교의 공안선은 갈등하는 양극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서 그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이는 갈등으로 갈등을 푸는 역설적 방법이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믿음이 역동적인 까닭은 긍정과 부정, 믿음과 의심이 역동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함께 작동하는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은 믿음을 부인하고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연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믿음의 불꽃이 더욱 밝고 높이 타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믿음과 의심 즉 긍정과 부정, 또 달리 말하자면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과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의심 사의 팽팽한 역동적 긴장을 터뜨려 날려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무문선사가 말하는 것처럼, 분별심을 끊어버림으로써 믿음과 의심의 분열과 간극을 없애려는 데 간화선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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