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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5) 깨침의 양가성 '조신'적 깨침과 '교신'적 깨달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by 도생(道生) 2014. 11. 8.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5) 깨침의 양가성 '조신祖信'적 깨침과 '교신敎信'적 깨달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에서는 불교의 깨달음을 각기 서로 다르게 표현한다.

중국에서는 '오悟', '각覺', '견성見' 등으로 표현하고, 일본에서는 '사토리', '겐쇼' 등으로 표현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깨침', '깨달음' 등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깨쳐야 하는가? 깨쳐야만 세계와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침은 지금 여기서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깨침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특별한 그 무엇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역동적 긴장관계를 어떻게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생은 단순히 인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에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따라서 깨침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자기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등을 포함한 모든 관계의 근원적 조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깨침과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박성배교수는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말의 '깨지다'와 '깨치다'는 모두 '깨다'라는 말의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유리창을 깨다' 또는 '판을 깨다' 같은 파괴적인 뜻과 '잠을 깨다' 또는 '국문을 깨다'처럼 건설적인 뜻이 함께 쓰이는 것이 우리말의 '깨다'라는 말이다.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이 함께 하는 자리가 '깨침'인 것이다.

 

안과 밖에 다르고 앞과 뒤가 다른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인 개체의 경우는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의 동시 공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질적인 여럿의 동시 공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불교의 깨침은 본래 연기적 존재인 인간이 잘못하여 비연기적으로 살다가 그 잘못됨이 송두리째 부서지고 깨지면서 동시에 다시 연기적인 삶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깨침은 양가성(兩價性,상대적 두 가치)을 지닌다. 즉 깨침은 깨침을 내포한다. 깨짐의 부정과 깨침의 긍정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각과 불각, 부처와 중생을 차별하는 이분법적 틀이 깨진다.

 

그 이분법적 틀을 제몸으로 삼고 있다가 그 몸을 깨버리고 불이의 부처님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 깨침, 깨침을 통해서 무명 중생의 차별적인 세계로부터 차별하지 않는 부처님의 세계로 자기 자신을 전환한다. 그 불이의 세계에는 깨침과 못 깨침, 부처님과 중생, 나와 너, 몸과 몸짓의 구별조차도 없다."

 

 

 

 

 

 

 

 

 

 

깨달음이 모든 것을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라면, 깨침은 주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몸 그 자체의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주객일체의 이해는 시공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주객일체의 상태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시공이 변화하면 그런 인식도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깨침은 깨달음과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 깨침은 주객이분법이 깡그리 깨어져 파괴됨과 동시에 주객일체법이 되살아나는 동시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깨지는 것은 무엇이고, 깨치는 것은 무엇인가?

 

 

 

 

깨지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주체와 객체를 둘로 나누어 보는 분별심과 아집이 깨지는 것이다. 깨짐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과 '나는 무명의 중생이다'라는 회의와 의심 사이의 역동적 긴장이 팽팽한 평행선을 치달리다가 그 극한의 상태로 나아가서 폭발을 일으켜야 한다. 있음과 없음, 긍정과 부정이 동시성을 이룰 때, 양자를 나누어보는 분별심이 깨지는 것이다.

 

이처럼 깨침은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이 동시 공존하는 양가성을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박성배교수는 "지적인 깨달음은 불교의 깨침이 아니다. 거기에는 깨침이 없기 때문이다. 깨짐이 없는 깨침은 불교의 깨침이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깨침은 '돈점논쟁'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문제제기다. 그렇다면 돈점논쟁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돈쟁 논쟁의 주변에 감도는 혼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사람들이 돈점 논쟁에 동원된 언어에 익숙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다. 논쟁에 동원된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불꽃 튀기는 쟁점이 부각될 수 없고, 따라서 사상 발전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점'이란 말을 들을 땐 그게 무슨 말인지 곧장 알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피어나지만, '돈'이라 하면 아무 것도 느껴지는 게 없고, 따라서 말문도 막히고 생각도 막혀 버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들은 그 태도에 따라 대강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돈의 의미를 제먹대로 해석하여 거기에 위험한 가치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후자는 분명 사상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논쟁이라 하면 귀를 막는 사람들도 많다."

 

 

 

 

불교의 '돈점논쟁'은 유교의 '사칠논쟁'과 함께 한국철학사를 빛낸 금자탑을 이루었다.

 

문제는 '돈잼논쟁'에서 '돈'과 '점'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에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돈점논쟁'에서 핵심과제는 '돈'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돈'은 우리말로 '몰록'이란 뜻이다. '몰록'은 '갑자기'라는 뜻으로 영어의 'sudden'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어권에서는 'sudden enlightenment'라고 번역한다.

 

문제는 우리말의 '갑자기'이든 영어의 'sudden enlightenment'이든 둘 다 똑같이 그 언어의 성격에 있어 하나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건에 소요되는 시간의 길이가 아주 짧다는 것을 연상시켜 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거나 어떤 일이 갑자기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몰록'을 이런 사유방식에서 접근한다면,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  왜냐하면 '몰록'은 인간의 감각적인 작용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시공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시공의 흐름을 뒤좇아가면서 관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몰록'은 시공의 틀을 벗어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주객일체적 사유이다. 증산 상제님께서 "천지가 24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음이 시공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곳에서 발현되는 것이 바로 '몰록의 깨침'이다. 따라서 시공의 틀에 갇혀서 보는 사유와 시공의 틀에서 벗어나 보는 사유는 서로 다르다.

 

 

 

 

 

 

 

 

 

 

 

 

'돈점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몰록 깨친다는 '돈오'의 입장과 전차적으로 닦아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점수'의 입장을 어떻게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오와 점수의 통합'을 '점수로써 돈오에 이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지눌은 '돈오'를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해오解悟'이고, 다른 하나는 깨치는 '증오證悟'다. '해오'는 "깨치거나 깨치지 못하거나 관계없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거기엔 잘못도 많기 때문에 반드시 그 뒤에 점수가 뒤따라야 증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가 먼저 '해오'를 얻고 그 전제 위에서 '해오'에 의거하여 '점수'를 행함으로써 '증오'라는 마지막 깨침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박성배교수는 지눌의 '돈오점수론'이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한다.

 

첫째, 지눌은 깨침 아닌 것을 깨침이라고 말한 오류를 저질렀다. 즉 '해오'는 진정한 깨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해오'에 대해 지눌은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후세에 불필요한 많은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둘째, 지눌은 깨침 아닌 것을 깨침이라 규정함으로써 닦음의 의미마저도 변질시켰다는 점이다. 지눌은 지눌이 비록 닦음을 '보현행'이라고 하여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증오'의 '구경각'이 닦음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눌의 '돈오점수론'의 근본취지는 '돈오' 뒤에도 '점수'가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눌은 "그저 무작정 점차 닦아 나가는 데에만 몰두하는 점수의 병폐를 돈오론으로 치유하고, 돈오만 하면 된다고 하여 점차 닦아 나가는 데 소홀한 병폐를 점수론으로 치유하려 했던 것이다."

 

 

 

1981년 해인사의 성철스님은 선문정로에서  지눌의 '돈오점수론'을 비판하고, '돈오돈수론'을 제창하였다.

 

즉 점차적 닦음을 통해 몰록 깨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몰록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입장이었다. 깨침이란 결코 점차적인 닦음으로 얻을 수 없다. 점차적인 닦음은 중생과 부처의 차이와 간극을 인정하는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송광사의 보조사상연구원은 즉각 이런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론'에 반박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문제는 해인사의 '돈오돈수론'과 송광사의 '돈오점수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함으로써 양자의 입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박성배교수는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새롭게 통합할 수 있는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생멸사에서 무생사제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무상사제를 알면 그 속에 생명사제가 집착도 모순도 없이 잘 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눌 사상을 평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명사제 같은 돈오점수에서 교진여의 깨침 같은 돈오돈수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일단 돈오돈수가 무엇인 줄 알면 돈오점수는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돈오돈수의 관문을 돌파한 다음의 돈오점수는 관문 돌파 이전의 돈오점수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말이 같다고 하여 똑같은 것인 줄 알면 큰일난다. 부디 우리는 막힌 길로 가려고 하지 말고 열린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몸짓에서 몸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일단 몸으로 돌아가면 그 속에 온갖 몸짓이 자유자재로 조화롭게 일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불교 공부도 그런 것이다.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의식이 몸짓에 머물러 거기에 집착하면 온갖 병이 다 생긴다. 몸짓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몸이 몸 노릇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몸과 몸짓의 관계는 자연스런 생명 본연의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대립관계로 변해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 싶다. 몸으로 하여금 몸 노릇하도록 내버려 두라.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이든 도를 닦는 사람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일일 줄 안다. 몸짓의 속박에서 벗어나 몸이 몸 노릇을 제대로 하는 세계가 바로 깨침의 세계요, 몰록 돈의 세계요, ㅂ처님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성배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한다.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은 서로 다른 별개의 그 무엇이 아니다. '돈오돈수론'은 본래적인(體) 측면을 말하고, '돈오점수론'은 작용적인(用) 측면을 말한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순간 몰록 깨치고 단박에 닦은 것이다.

 

물록 깨침이란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고, 단박 닦음이란 부처와 중생을 이원화하는 망상을 한순간에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깨침과 닦음이 인간의 본성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따로 깨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고정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는 역동적 변화의 과정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깨침과 닦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그 본래의 깨침과 닦음을 매 순간마다 재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닦음은 깨침을 전제로 해서 행하는 닦음이지 깨치기 이전에 깨치기 위해서 닦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그 존재론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돈오돈수론'을 바탕으로 '돈오점수론'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역동적인 삶의 연속적 과정이다.

 

 

우리는 이런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의 관계를 '생멸가제生滅四諦'와 '무생사제無生四諦'의 관계로 설명할 수있다.

'생멸사제'는 생겨난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무생사제'는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이 원래 생겨남도 소멸함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상사제'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의식은 생성과 소멸도 없는 본래세계임을 알지 못한다.

 

 

즉 '생멸사제'와 '무생사제'를 둘로 갈라보는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에서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을 깨 부수어 '생멸사제'와 '무생사제'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면 눈 앞에 펼쳐지는 일 자체 그대로 중생의 모습이 바로 부처의 모습이거 번뇌가 바로 보리이며 지옥이 바로 극락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을 깨 부수어냐만 몰록 깨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근본적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전의轉依'가 바로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의'는 불교철학에서 깨침의 체험을 논의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유가사상은 흔히 유식사상이라고 불리는데, 유식의 교위에서는 의식을 분석하여 여덟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을 느끼고, 현상과 존재의 뜻을 알아차리는 간각 및 자각 작용이 표면에 떠올라 있는 여섯 가지 의식이다. 이를 흔히 전유식이라고 부른다. 그 아래에는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제칠식이 있고, 그 아래 최심층에 아라야식이라고 부르는 제팔식이 있다.

 

전육식이 빚어내는 온갖 분별과 집착의 습관적인 기운이 이 제팔식에 축적된다. 이것을 훈습이라고 한다. 그것이 다시 앞의 일곱 가지 의식에 투영되면서 주객이분법을 바탕으로 한 자기중심적 분별이 자행된다. 이 분별이 집착과 고통, 끝없는 윤회를 낳는다.

 

전의란 아라야식을 일거에 근본적으로 뒤짚어서 그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즉 주객이분법을 바탕으로 자기중심적인 분별을 자행하는 앞의 일곱 가지 의식과 분별, 집착의 훈습을 없애고 분별, 집착이 없는 본래의 마음 상태인 불이의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 있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식 사상에서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유식 사상이 인식대상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것은 인식주체의 독자성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다.

 

 

유식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제를 말하는 것과 말하여 지는 것,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듣는 것과 들리는 것, 만드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여지는 것 등이 둘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만약 주체와 객체를 대상화해서 파악하는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을 깰 수 있다면, 인식의 주체가 바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과 하나가 된다. 중요한 것은 주객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고, 주객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우리의 의식이 본래 연기법으로써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사상의 의식 이론은 모든 것이 연기의 관계임을 이야기 한다. 인간이 지각하고 감각하는 것은 모두 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의식은 또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까 내면의 의식과 외부 세계의 현상 사이에는 연기적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이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는 깨친 이든 깨치지 못한 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깨우치치 못하고 주관과 객관을 따로 세워 놓은 한 끊임없는 분별, 망상, 번뇌의 업을 지으며 윤회할 뿐이다. 의식의 주체 또는 원인으로서 작동하여 객체 또는 결과로 온갖 현상을 만들어 내면 끊없는 윤회의 순환이 벌어진다. 그러한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명 때문에 의식이 환상으로 현상을 지어내게 되고, 그 환상의 현상이 다시 무명의 의식을 훈습한다. 이것이 바로 윤회이다."

 

 

 

 

유식 사상에서는 무명의 훈습을 깨고 의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뜻하는 '전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삼성설'을 제기한다. 여기서 '삼성설'이란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을 말한다. '삼성설'은 '전의'의 논리적 구조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의타기성'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난다는 것으로 연기를 말한다. '변계소집성'은 모든 것을 분별하여 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모든 것을 집착이나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원만하게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리 인간이 만물의 연기성을 아무런 집착이나 분별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분별의 세상이 곧바로 부처의 이상세계가 된다. 따라서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의타기성'을 제대로 깨치는 것이다.

 

 

 

저명한 일본의 학자 나가오 가진은 '전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의란 그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자기가 의지하던 기반, 근거가 뒤짚어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또는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땅이 뒤집히고, 새로운 세상이 새로운 빛을 받아 나타난다. 자기가 딛고 선 기반이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는다. 그것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려 한다는, 즉 죽음이 닥친다는 엄청난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죽음을 통해서만이 자기의 기반이 새로운 빛을 받아 되살아날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 전체가 뒤집어지고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자기장이 있다고 가정하면, 전의라는 것은 그 자기장이 일상적인 방향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가오 가진의 '전의'에 대한 해석을 읽어보면, 증산도에서 후천개벽의 신천지(新天地)가 새롭게 열리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나가오 가진이 '전의'를 단순히 인간 의식의 근본적 변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가오 가진은 인간이 발 딛고 서 있는 천지(天地)까지도 뒤바뀐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전의'에서 의식이 바뀌면 세상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개벽이 자연개벽의 전제조건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나가오 가진은 죽임과 살림이 동시적 전환을 이루는 곳에서 '전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죽이면서 살리고 살리면서 죽인다는 증산도의 '춘생春生'과 '추살秋殺'의 양가성과도 유사한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오 가진은 새 인간에 의해서 새 하늘 새 땅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는 동시적 전환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 자전축 경사의 변동과 지구 공전궤도의 변화와 인간 의식변화의 동시적 상관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근원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천지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뒤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나가오 가진이 인간의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인류 구원의 관건인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전의'는 의식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뒤바뀜으로써 인간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다. 연기하는 세계가 곧 본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변계소집성'으로 인하여 인간이 차별적 분별의식을 일으키기 때문에 횬상세계에 얽매여 진정한 깨침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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