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 혈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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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 혈죽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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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결한 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과 혈죽(血竹)

 

 

 

 

 

 

 

 

 

 

 

 

 

일본 제국주의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빼앗자 충정공 민영환은 자결하였다.

민영환의 피가 묻은 옷을 보관하고 있던 마루에서 그의 충절을 기리는 듯한 혈죽(血竹)이 돋아났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민영환에게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내렸다.

 

 

 

 

조선 26대 왕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1818~1898)는 민치구(1795~1874)의 딸이다.

민치구의 아들이며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남동생 민겸호(1838~1882)는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친아버지다.

 

민치구의 아들이며 여흥부대부인의 남동생 민승호(1830~1874)는 아들이 없는 11촌 민치록(1799~1858)의 양자로 들어갔다.

고종(1852~1919)의 왕비 중전 민씨(1851~1895)는 민치록의 딸이다.

중전 민씨의 양 오빠 민승호는 충정공 민영환에게는 친 백부가 된다.

 

 

 

 

 

 

 

 

 

 

 

 

1861년(철종 12)에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난 충정공 민영환은 아들이 없던 백부 민태호의 양자로 들어갔다.

충정공 민영환은 고종의 외가(여흥부대부인) 친척이며, 고종의 처가(중전 민씨) 친척이 된다.

 

 

충정공 민영환은 16살 되던 1877년(고종 14) 16세 이하의 동몽(童蒙)을 가르치는 종 9품의 동몽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878년(고종 15) 17살에 정시 병과 9위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800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조선(대한제국)은 약 100년간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판을 쳤다.

고종 재위 때는 풍양 조씨와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가 미친 듯이 활개 쳤던 시절이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할 시기에 관직에 나간 충정공 민영환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직부전시, 홍문관 정자, 검열, 수찬에 이어 1881년(고종 18)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역임한다.

 

 

 

 

 

 

 

 

 

 

 

 

21살 되던 1882년(고종 19) 정3품 당상관의 성균관 대사성(국립대학교 총장)에 오른다.

친아버지 민겸호는 임오군란(1882년) 때 양아버지 민태호는 갑신정변(1884년) 때 살해되었다.

친아버지가 죽었을 때 관직을 그만두고 3년상을 치렀다.

 

1884년(고종 21) 이조참의, 홍문관제학, 협판내무부사사, 시강원겸보덕, 이조참판, 개성유수, 전환국총판, 한성우윤, 친군기연해방영사, 기기국 총판, 규장각직제학, 상리국총판, 형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한성부판윤, 의정부좌참찬, 이조판서 등의 관직을 거친다.

  

 

 

1895년(고종 32) 종1품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중전 민씨가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다.

 

1896년(고종 33) 특명 전권공사 자격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이때 청나라, 일본,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지를 다녀왔다.

 

 

1897년(고종 34) 특명 전권공사 자격으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에도 참석하였다.

이때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등지를 돌아보고 왔다.

 

 

 

 

 

 

 

 

 

 

 

민영환은 국민 계몽과 자주독립, 그리고 근대화 운동을 내세운 서재필의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두 차례 서양 선진국을 돌아본 민영환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과 제도를 보고 조선 근대화에 앞장선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도 민영환은 승승장구했다.

의정부참정, 내부대신, 군부대신, 참정대신, 탁지부대신, 장례원경, 표훈원총재, 육군부장, 헌병사령관, 외부대신, 수민원총재 등을 역임했다.

 

 

 

1902년(고종 39) 충정공 민영환은 수민원(綏民院)을 세워 미국 하와이에 7천 명이 넘는 조선 백성을 이민 보내는데 앞장섰다.

1905년(고종 41) 참정대신, 외무대신에 있다가 시종무관으로 좌천된다.

 

 

 

 

 

 

 

 

 

 

1905년 7월 29일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자는 미국과 일본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다.

11월 17일에는 일제가 강압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빼앗는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충정공 민영환은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을 폐기할 것과 을사늑약을 찬성한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민영환을 체포하여 구금하였고, 민영환은 풀려난 다음 날인 1905년 11월 30일 강압 때문에 체결된 을사늑약에 항거하며 자살한다.

 

 

 

충정공 민영환은 친러파였고 친미파였다.

충정공 민영환은 왕실의 척족으로 약간의 부침이 있긴 했으나 승승장구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대한제국(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파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길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충정공 민영환의 자살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이 자결을 하였고, 민충정공의 죽음은 일제에 항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충정공 민영환이 자살한 곳에서 혈죽(血竹)이 생겨났다.

순절한 민영환의 충절에 하늘이 감동하여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인지 민영환의 피 묻은 옷이 보관된 곳 마룻바닥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혈죽(血竹)은 절죽(節竹)이라고 불린다.

 

충정공 민영환의 순절할 때 나이가 45살인데 신기하게도 마루에서 솟아난 대나무(혈죽) 잎 개수 역시 45개였다.

 

 

 

충정공 민영환은 대한제국 '육군부장 정일품 대훈위(陸軍副將 正一品 大勳位) 민영환(閔泳煥)'이라고 새겨진 명함에 고종황제와 재경 외국사절, 그리고 2천만 대한제국 백성에게 각각 유서를 남겼다.

민영환은 대한제국 최고관직인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대신으로 추증되었다.

 

 

 

충정공 민영환이 고종과 중전 민씨의 척족(외척)세력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 것은 분명하다.

당시는 임금과 중전 민씨를 비롯하여 조정 대신 대다수, 특히 척족(외척)세력의 부정부패가 유독 심했다.

그래서 1895년 갑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 전봉준 장군은 민영환을 탐관오리로 지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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