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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군주 개혁군주 정조대왕의 치세(治世)를 뒤집은 영조의 계비,

사도세자의 계모, 정조대왕의 계조모 정순왕후 경주 김씨

 

 

 

 

 

 

 

 

 

 

 

 

 

 

 

조선왕조의 대표적 소통군주이며 근대화와 문화융성을 이룬 개혁군주의 상징 정조대왕은 치세(治世)로 부강을 꿈꾸던 군주였다.정조대왕의 치세를 뒤집어 조선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중심에 영조(1694~1776)의 계비, 사도세자(1735~1762)의 계모, 정조(1752~1800)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경주 김씨(1745~1805)가 있었다.

 

 

 

 

정순왕후 경주 김씨는 1745년(영조 21) 노론계 경주 김씨 김한구와 원주 원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의 왕비(정비) 정성왕후 서씨가 1757년(영조 33)에 66세로 승하한다.

 

 

 

장희빈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영조의 아버지 숙종이 후궁은 절대 왕비가 될 수 없게 하였다.

조선의 국모자리가 비어 있자 신하들이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라는 강권에 마지못해 새로운 왕비를 맞는다.

 

 

 

 

장순왕후 경주 김씨는 1759년(영조 35)에 영조의 두 번째(계비) 부인이 되어 조선의 국모가 된다.  

당시 영조는 66살의 노인이었고, 정순왕후 경주 김씨는 15세였다.

영조와 정순왕후는 무려 51세의 나이 차이가 났다.

 

 

 

 

 

 

 

 

 

 

 

 

 

 

정순왕후가 왕비가 된 시점은 정조대왕의 아버지 25세의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고 있을 때였다.

사도세자는 15세였던 1749년부터 1762년까지 근 14년간 대리청정을 하였다.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영조, 노론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 사도세자의 세자빈 혜경궁 홍씨 집안도 노론이었다.

 

노론(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할 때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노론과 첨예한 갈등을 빚는다.

노론 내부의 치열한 권력다툼과 노론과 사도세자의 갈등은 결국 아버지 영조가 아들 세도세자를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을 만든다.

 

 

 

 

 

영조의 계비, 사도세자의 계모, 정조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와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외척, 영조의 딸 화안옹주와 양아들 정후겸 등 노론(벽파) 세력이 뭉쳤다.

 

사도세자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세력은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 이산(정조대왕)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온갖 협작질을 했으나 영조는 끝까지 왕세손 이산만은 지켜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하게 한다.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대왕은 어머니 홍씨의 친정아버지이자 자신의 외할아버지 홍봉한과 계조모 정순왕후를 제외한 노론 벽파 세력을 숙청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연관된 강경파 노론 벽파가 상당수 숙청됐고 온건파였던 노론 시파는 살아남았다. 

정조대왕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겨둔 노론 벽파 세력은 뿌리를 깊이 내렸던 만큼 서서히 세력을 회복해 나간다. 

 

 

 

 

주도권을 잃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 세력은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정조대왕의 이복동생 은언군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정순왕후는 은언군의 큰아들 상계군을 역모로 몰아 은언군을 죽이라는 언문전교를 내린다.

 

 

 

그러나 정조대왕은 이복동생 은언군의 목숨을 끝까지 지켰다.

강화도로 유배됐던 은언군의 손자가 바로 조선의 25대 왕으로 즉위한 강화도령 철종이다.

 

정조대왕 승하 후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수렴청정하던 때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는 천주학을 한다는 이유로 처형됐고 은언군도 사사된다.

 

 

 

 

 

 

 

 

 

 

 

 

 

 

1800년(정조 24) 병세가 깊어진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한다.

 

정조의 승하를 본 사람은 영조의 계비, 사도세자의 계모, 정조의 계조모인 정순왕후 경주 김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정조대왕의 최대 정적이었던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혼자서 약을 가지고 들어간 뒤 정조가 승하하여 독살설이 끊임없이 회자한다.

 

 

 

 

정조대왕은 승하하기 전 왕세자 아들(순조)을 장인인 노론 시파 안동 김씨 김조순에게 잘 보필하여 주라고 부탁하였다.

 

박학다식하고 혁군주의 상징이었던 정조대왕 이산의 일생일대 가장 큰 실수였다.

당시 치열한 대립과 권력투쟁의 상황 속에서 정조가 선택할 수 있는 한계도 있었겠지만, 정조가 선택한 김조순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조선을 개혁한 개혁군주 정조의 치세는 정순왕후와 그 일파에 의해 뒤집어지며 정조의 개혁정치는 물거품이 되었다.

 

1800년(순조 즉위년) 11살 순조의 즉위와 함께 수렴청정을 시작한 대왕대비 정순왕후 경주 김씨와 부활한 노론 벽파는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의 최일선에서 조선을 근대화시키고 문화를 융성하게 한 신하들을 숙청하는 등 정조의 치세를 모두 뒤집어버린다. 

이들은 남인을 제거하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신유박해를 만든다. 

 

 

 

 

 

1803년(순조 3) 정순왕후는 창경궁 인정전의 화재 발생 이후 대리청정을 그만두고 물러난다.

1805(순조 5) 정순왕후 경주 김씨가 61살에 세상을 떠난다.

 

15살 어린 나이에 66살의 할아버지뻘인 영조의 두 번째 왕비가 되어 가례를 올렸다.

영조와 16년, 영조가 승하하고 30년 동안 궁궐에서 지내며 권력의 쫓는 불나방의 삶을 살았다.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순조의 부인이며 효명세자 세자의 어머니인 순원왕후 안동 김씨 외척 세력이 권력을 전횡한다.

 

순조의 장인이며 노론 시파인 김조순은 순조를 섭정하며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을 일삼는다.

김조순을 시작으로 한 60년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조선을 몰락의 길로 몰고갔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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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0.13 0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순왕후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하늘마법사 2016.10.13 1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순왕후에 대해 잘 알아갑니다^^

근세조선 22대 왕 정조(正祖)대왕 이산 -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1752~1800)은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1694~1776)의 손자다.

영조대왕 이금과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사도세자(1735~1762)의 아들이기도 하다.

 

 

정조대왕 이산은 영조대왕과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효장세자(1719~1728)의 양자로 입적하여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했다.

 

 

 

 

정조대왕이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 영조대왕이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명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는 반대했었다.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의 팔자 흉언(八字 凶言)을 유포하기도 했다.

 

노론 벽파를 의식한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아들에서 효장세자(영조의 큰아들)의 아들로 입적시켜 보위에 올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즉위를 전후하여 노론이 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즈음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분열됐다.

 

벽파는 홍인한(노론의 영수,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동생)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외척 중심 세력이고, 시파는 정조의 정치 노선을 따랐던 소론과 남인 및 노론의 일부 세력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즉위 초부터 끊임없이 암살의 표적이 됐다.

노론 벽파는 1777년(정조 1) 전흥문을 시켜 정조를 암살하려다 실패한다.

정조의 최측근이었던 홍국영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갖고 전횡을 일삼다 유배되어 죽는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할아버지 조선의 21대 왕 영조대왕의 탕평책을 계승한다고 천명하였다.

남인 출신 채제공을 정승에 임명하고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등 노론, 소론, 남인 등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여 노론 벽파 세력이 약화하였다.

 

 

 

 

 

 

 

 

 

 

 

 

 

 

정조대왕은 친위부대 장용영을 2만의 대군으로 키웠다.

임금의 경호와 한양 도성뿐만 아니라 수원 화성을 수비했다.

 

정조의 수원 화성 능행 행차에 장용영 3천 명이 동원되기도 했는데, 이런 대내외적인 과시는 능행길 장용영의 사기를 높여주기도 하지만, 친위군 장용영의 군사적 기반은 그동안 붕당 세력에 휘둘린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는 왕권 강화의 목적도 있었다.    

 

 

 

 

 

 

 

 

 

 

 

 

 

 

정조대왕 이산은 조선왕조의 위대한 군주였으며 천하의 효자이기도 하다.

1788년(정조 13)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화성(수원)으로 이장했다.

 

1789(정조 14)년부터 1800년(정조 24)까지 무려 12번이나 아버지가 계신 현륭원을 찾았다.

1794년(정조 18)에는 현륭원(사도세자의 능)에서 대성통곡을 하다가 혼절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 벽파는 정조가 수원 화성을 오가는 길을 보며 자기들이 지은 죄 때문에 감히 나서지도 못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현륭원의 배후도시 화성의 설계를 맡겼다. 

 

 

 

 

 

 

 

 

 

 

 

 

수원 화성은 당시 선진 과학기술을 접목하여 만든 조선의 정치, 문화, 사상, 예술 등이 집약된 건축물이다.

축성에 10년을 예상하였으나 신기술을 접목하고 공짜가 아닌 임금(급료)을 지급한 덕분에 일에 능률이 올라 불과 3년도 안 돼공됐다.

 

 

수원 화성만 축성한 것이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길을 만들고 각종 물품을 판매하는 상가들도 조성되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12차례 오가는 동안 백성을 만나고 백성의 소리를 몸소 들었다.

 

 

 

 

 

 

 

 

 

 

 

 

 

 

 

노론이 주도권을 잡았던 정국을 소론과 남인, 실학자 등도 참여할 수 있게 붕당정치를 타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를 개혁하였다. 엄청난 양의 도서가 보관된 왕실도서관 규장각에서는 젊은 관료를 중점으로 학문과 교육, 업무 능력을 신장시키는 등 규장각은 학문과 정치의 산실로 미래를 위한 개혁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뿐만 아니라 성리학을 비판하는 양명학과 천주학(서학) 등을 용인하며 사상 개혁을 하였다.

 

할아버지 영조대왕이 밑돌을 깔아 놓은 국가 중흥의 발판 위에 조선의 문화를 더욱 융성하게 하려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였다. 북학파이며 서자로 출사를 하지 못하고 있던 박제가, 유득공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신분 개혁을 하였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진정한 개혁군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완전한 개혁은 미완의 개혁이 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개혁 정치를 실현하였던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개혁군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노론 벽파는 정조의 개혁 정치를 좌절시키기 위해 갖은 음모와 모략을 꾸민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등 천주교의 행위는 노론 벽파의 공격거리가 되었다.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를 계기로 노론 벽파는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정조는 신해공통을 발표하여 육의전 상인들의 독점권(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일반 소상인의 상업을 진흥했고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제도로 백성소통다.

 

증보동국문헌비고, 속오례의, 대전통편, 국조보감, 문원보불, 동문휘고, 오륜행실, 규장전운 등이 출간됐다.

지도 제작, 천문과 과학의 발전을 비롯하여 민간에서는 미술, 문학작품 출판 등 조선의 모든 백성이 각자의 위치에서 문화에 대한 의식이 커지며 문예가 부흥한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임금으로 즉위 후 세상을 향한 첫 마디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이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를 이어받도록 명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만백성의 군주(君), 만백성의 스승(師), 만백성의 어버이(父)였던 위대한 군주 정조대왕 이산.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고 자신을 위협하던 노론 세력을 포용하고 국정 쇄신을 한 개혁군주 정조대와 이산.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했고 평생을 살해위협에 시달리다 결국 의문의 죽음을 당하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군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하늘이 임금을 만들고 스승을 만든 이유는 백성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라고 했다. 정조대왕 이산은 백성을 교화(敎化)하는 스승임을 자임했다.

 

 

 

 

 

 

 

 

 

 

 

 

 

 

정순왕후(1745~1805)는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대왕의 계비(영조와 51살 차이) 정조보다 7살 많지만, 할머니가 된다.

정순왕후 오빠 김귀주는 노론 벽파였고 정조의 등극을 반대했던 인물이며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을 공격했던 인물이다.

 

김귀주는 결국 유배됐다 죽게 된다. 이 일로 정순왕후는 정조에게 원한을 품고 정조가 승하할 때까지 괴롭힌다.

개혁군주 정조대왕 이산이 갑작스럽게 승하하면서 조선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주도권을 잡으세도정치로 넘어간다.

 

 

 

사도세자의 아들로 개혁군주였던 조선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은 49세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묘호는 정조(正祖)이며, 시호는 천자의 나라, 황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선황제로 추존하여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조선왕조의 22대 왕 정조대왕 이산부터 27대 순종까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 후손은 조선의 왕이 되었다.

 

고종과 철종은 본래 인조대왕의 아들 인평대군의 후이다.

고종의 친할아버지 남연군 이구가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였고,

고종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사도세자의 손자)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 - 조선의 22대 왕(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의 손자 순조 이공 - 조선의 23대 왕(정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의 손자 헌종 이환 - 조선의 24대 왕(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의 아들)

사도세자의 증손자 철종 이변 - 조선의 25대 왕(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의 손자)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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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저자들

안함로 , 원동중 , 이암 , 범장 , 이맥

 

 

 

 

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안홍법사, 안함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불교가 흥했던 신라의 대표적 고승 열 분을 기리는 신라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이다.


23세(601, 진평왕 23) 때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5년 후 서역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찍이 세속 너머의 세계에 뜻을 두었던 안함로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또한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해동고승전』). 이로 보건대,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삼성기 상』 서두를 통해서도, 안함로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불선儒佛仙과 상고시대 신교 문화를 회통한 당대의 고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였다.

 

 

 

 

원동중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유립은 원동중을 고려 때 인물로 비정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암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고,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아버지의 명을 따라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비록 십대의 어린 나이지만, 그때 그는 외래풍이 뒤덮고 있는 고려를 그 옛날처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리라는 큰 뜻을 품게 되었다. 그가 당시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지은 시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다.

 

17세(1313)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에게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자, 이암은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도 자신을 ‘신臣’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으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도(1361)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 사퇴하고 야인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그는 어릴 때 유학 서적뿐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 천보산 태소암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고조선)시대를 기록한 고서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알아본 소전거사가 석굴 속에 감춰져 있던 사서들을 전해 준 것이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들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이 사서들은 『단군세기』와 함께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해운당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이암은 ‘인간은 어떻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의문에 대해 명쾌한 필치로 답하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은 실로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고려 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이다. 호가 복애伏崖라 하여, 복애거사로 불리었다.

 

그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는 남송南宋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는데 원元에 의해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하였다. 조부 범유수范有障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을 본관으로 삼으면서 금성錦城 범씨范氏가 되었다.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읠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그후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과 함께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으로 내려와 성리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중국 서적 『고려사高麗史 사적개요史籍槪要』에 의하면, 고향에 돌아온 그가 노닐던 곳인 ‘복암伏岩’에서 이름을 따 자신의 호 ‘복애’를 지었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도학과 충절을 지킨 신라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한 책),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이암의 생애를 소개하면서 밝혔듯이, 범장은 젊은 시절에 천보산에서 이암과 이명을 만나 한민족 상고 역사의 진실을 드러낼 것을 결의한 후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시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고, 나아가 고조선 → 북부여 → 삼국시대 → 고려로 이어져 온 국통 맥을 온전히 이어가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였다.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행촌 이암의 고손자이며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책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그는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되자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 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접하게 되었다. 그 금서에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 둔 글들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 『태백일사』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한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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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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