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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10.24 한일강제병탄 한일합병(합방)조약 경술국치일 (1)

일제가 '한일병합약' 또는 '한일합방조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한일병탄(韓日倂呑)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피탈(被奪) 당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

 

 

 

 

 

 

 

 

 

 

 

 

일본 제국주의는 친일파 매국노들과 야합하여 강압적이고 일방적으로 체결한 소위 '한일병합(韓日合倂)조약' 또는 '한일합방(韓日合邦)조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는 '합병(合倂)'이라는 용어가 강대국이 약소국을 강제로 합친다는 것과 두 나라의 관계만을 국한한다는 의미를 벗어 보려고 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병탄(韓日倂呑) 국제사회가 인정하고 두 나라 간의 합법적인 조약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한일병합조약' 또는 '한일병합조약'은 두 나라가 동등한 위치에서 체결한 조약(條約)이 아니기 때문에 조약이 될 수 없습니다. 굳이 표기한다면 일본 제국주의가 친일파 매국노들을 내세워 강제로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늑약(勒約)이라고 해야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침탈하고 식민지배를 했기 때문에 한일병탄(韓日倂呑)이라고 해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에 공식 공포한 소위 '한일병합조약' 또는 '한일합방조약'의 내용을 보면 한일병탄은 국제법상 무효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한일병합조약' 문서 내용은 일제와 친일파들이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일본 제국주의 '천황'에게 순순히 나라를 바친다는 내용으로 만들었는데, 국가 간의 조약에 반드시 찍혀있어야 할 대한제국 국새(國璽)와 순종 황제의 친필서명이 없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합니다.

 

'한일병합조약' 문서에는 국가 간의 조약에 인정되지 않고 나라의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하는 어새(御璽)가 찍혀있다는 것은 조약의 공식 문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에 한일병탄은 무효가 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서 날조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 왜곡과 날조로 이어졌습니다.

왕정복고에 성공한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약 80년 동안 왜곡 조작한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이 오늘날까지 식민사학을 신봉하는 자들에 의해 우리나라 역사로 둔갑해 왔습니다.

 

경술국치일 1910년 8월 29일에 공포해 현실이 된 한일병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해 식민지배를 준비한 것은 現 일본 총리 아베가 가장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이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면서부터입니다.

 

 

 

 

 

 

 

 

 

 

 

조선을 정벌한다는 소위 '정한론'은 일제 식민사관의 학문적 이론이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으로도 조선 침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지유신으로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 곧 '정한론(征韓論)'을 펴기 위해 일방적인 통상요구를 했습니다.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한 이른바 '강화도조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입니다.

 

1882년 7월 19일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와의 차별 때문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 고종은 청나라 군대 파병을 요청했고 임오군란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군대를 주둔 시켜 조선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도 이때 신식 군대(별기군) 훈련 교관을 비롯해 일본인 10여 명이 죽었고,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는 피해를 봐 일본 제국주의는 일본 공사관과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군을 조선에 주둔시켰습니다.

 

1882년 8월 30일 조선은 임오군란 당시 피해를 본 일본에 배상하는 이른바 '제물포조약'을 체결했고 조약에 따라 1883년 제물포항(인천항)이 개항합니다.

 

 

1884년 12월 4일 일본을 믿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의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이때 민씨 정권이 청나라 파병을 요청하면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서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1885년 4월 18일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위해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고, 변란이 발생할 시 동시에 파병한다는 이른바 '톈진조약(천진조약)'이 체결됐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본 제국주의는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톈진조약'을 빌미로 일본군을 파병해 조선 군대와 함께 학군 30만 명을 무참하게 살육한 후 본격적으로 국권 침탈이 시작됐습니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2월 9일 일본의 요청으로 대한제국은 국외중립을 선언합니다.

1904년 223일 러일전쟁이 시작하면서 불안해진 일본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협력해줄 것을 강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합니다.

  

 

1905년 7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미국은 필리핀을 각기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고 인정하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가 극비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은 고종 황제의 서명 날인도 없이 강제로 체결됐습니다.

일제는 이것을 소위 '을사조약' 또는 '을사보호조약'이라 부르는데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빼앗았으며, 1906년 2월 1일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왔니다.

 

 

 

 

 

 

 

 

1907년 7월 18일 일제는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일본 제국주의가 순종 황제의 서명 날인을 위조한 소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대한제국의 행정권을 빼앗았고,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제국주의 각의에서 식민지배는 기본이고 조선의 모든 것을 패멸(廢滅) 시켜 일본 것으로 만든다는 소위 '한일병합에 관한 건'이 확정됐습니다.

 

 

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을 일본에 무조건 맡긴다는 소위 '기유각서(己酉覺書)'가 체결됐는데, 일제가 강압으로 빼앗은 것입니다.

 

1910년 8월 18일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이 주도한 내각회의에 소위 '한일합병조약안'을 상정해 통과시켰습니다.

1910년 5월 3대 조선 통감으로 임명된 데라우치가 1910년 8월 16일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과 조중응을 소환해 구체적으로 '한일병합조약' 체결 지시를 내립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단체 일진회 회원들이 거리 곳곳을 누비며 '한일합방'을 외치고 다녔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일진회를 동원한 것은 무력을 앞세워 강압적으로 국권을 침탈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합일합방'을 원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인데, 일본 극우세력이 아직도 이런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아래 대한제국 어전회의가 열렸고, 친일파 매국노들은 순종 황제를 허수아비 취급하며 반대하던 이용직을 쫓아내고 일방적인 찬성으로 '한일합방안'이 가결되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친일파 매국노 이완용은 윤덕영을 시켜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어새를 찍게 하고 서명을 위조한 소위 '한일병합조약'을 공포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에 공포한 한일병탄의 소위 '한일병합조약'은 한일늑약 또는 경술늑약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우리나라 식민지배를 시작한 날인기도 한 경술국치일은 국권을 피탈(被奪) 당한 치욕의 날입니다.

 

 

 

 

 

 

 

 

 

한韓민족의 6천 년 역사에서 국운이 쇠하여 침략을 당하거나 주변국을 떠받든 사대 역사는 있었지만, 나라가 완전히 패망한 역사는 없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처럼 치욕스러운 역사지만,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침략해 한국 모든 것을 폐멸(廢滅) 시키려던 불의한 역사를 부정하고, 파렴치하고 악질적인 전쟁범죄도 무조건 부정합니다. 치욕스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일병탄이 시작된 19010년 8월 29일은 우리에게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경술국치일이지만, 일본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긴 이래 가장 큰 죄를 지은 날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실상은 몸은 대한민국이지만, 정신은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 조작 말살해 만든 식민사학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작해 만든 식민사학을 청산하고 우리의 진짜 역사와 정신문화를 하루빨리 복원해 정체성을 되찾아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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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9.08.25 0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픔이 있는날이지요.ㅠ.ㅠ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휴일 되세요^^

  2. 청결원 2019.08.25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남은 주말 휴일 잘 보내세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3. 죽풍 2019.08.25 2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도 한일합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나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시끄럽게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4. 버블프라이스 2019.08.26 0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피탈 당한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 아픔이 있는 날이군요 ...
    몰랐던 근현대사 역사를 공부하고 갑니다^^

일본 제국주의 무력에 의한 한일강제 병탄,

한일합병(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 멸망 -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병합(倂合, 합병合倂)의 문자적 의미는 기구와 기업과 단체 등과 두 나라 이상의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합쳐진 것을 말한다.

병탄(倂呑)은 무력(武力)을 사용하여 남의 집이나 나라를 침범하여 재물이나 영토를 침탈(侵奪)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위로 강도와 도둑놈이 이 상황에 해당한다.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은 나라의 국권을 침탈당한 치욕을 당한 날이며,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날이다.

고려와 조선 왕조가 원나라와 명나라, 청나라의 속국이 된 적은 있었지만, 국가는 존속했었다. 

그러나 이른바 한일합병(합방)조약, 한일강제 병탄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국가가 사라졌다.

 

 

 

일제 치하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 동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됐다. 

강제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많은 애국지사와 무명의 백성이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기도 했으며 때론 억울하게 죽어갔다.

그리고 수많은 조선 백성이 강제 징집, 강제 노역, 어린 소녀가 강제로 끌려가는 등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한일강제 병탄, 이른바 한일합병(합방)조약이 치러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은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 날이다.

국가와 민족의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한(恨)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풍전등화에 내몰린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7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외교 주권을 상실했다.

같은 해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 식민화 작업에 들어간다. 

 

 

1907년 7월 1일 을사늑약 체결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부당함에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1907년 7월 20일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4일에 대한제국 내정에 조선통감부 더 깊이 관여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1907년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았고 입법과 사법, 행정과 군사 등 모든 결정권이 조선 통감부로 넘어갔다.

 

 

 

1909년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물러났다.

국가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하얼빈역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에 의해서 척살됐다.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 이어 1910년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부임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만들어진 조선 통감부는 해체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한일합병(합방)조약, 즉 한일강제 병탄으로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된다.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어전 회의를 열고 한일합병(합방)조약에 관한 안건을 상정하고 통과시켰다.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파들은 대한제국을 일본에 편입시키기 위해 미리 전권위임장과 조약문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부 데라우치 마사다케 통감이 한일강제합병조약문에 서명했다.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일) 강제로 체결된 한일합병(합방)조약이 공표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빼앗은 일본 제국주의는 5년이 지난 1910년 대한제국을 일본에 편입했다.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는 나라를 강제로 빼앗긴 날, 국권을 빼앗긴 치욕의 날이 1910년 8월 19일 경술국치일이다.  

한일강제 병탄은 오욕과 통한의 역사이며 한일합병(합방)조약이 아니고 강압에 의해 맺어진 한일강제늑약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압에 의해 체결됐고,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옥새와 서명이 없는 등 절차와 과정 등이 국제법상 정식 조약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을사늑약 이후 체결된 정미7조약과 한일병합(합병)조약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일본에 편입한 한일강제 병탄은 원천적으로 무효지만,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은 멸망했고 근 36년간 대한제국 영토를 강점했다. 

 

 

 

한일합병(합방)조약문 제1조에는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라고 되어 있다.

 

 

 

대한제국 2대 황제이며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는 승하하기 전 '지난날 병합 인준은 강린(强隣, 강한 힘을 가진 이웃 일본)이 역신(逆臣)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해서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요. 다 내가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脅制, 위협하고 견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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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borah 2016.10.24 1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완용의 활략이 있었군요. 매국노라는 말을 왜 하는지 알것 같군요